시(詩)/김광규
-
김광규 - 만나고 싶은시(詩)/김광규 2020. 4. 10. 12:15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낯익은 얼굴들이다 내가 모르는 낯익은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어디였던가 병아리떼 모이를 쪼으던 유치원 마당이었던가 솜사탕을 사먹던 시골 장터였던가 아카시아꽃 한참 핀 교정의 벤치였던가 불볕 아래 앉아 버티던 봉제 공장 옥상이었던가 눈물 흘리며 짐승처럼 쫓기던 봄날의 광장이었던가 술내기 바둑을 두던 숙직실 골방이었던가 간첩을 뒤쫓으며 헐떡이던 산마루였던가 친구를 기다리던 새벽의 구치소 앞이었던가 두부 장수 지나가던 골목길 여관방이었던가 줄담배를 피우던 산부인과 복도였던가 마늘을 싣고 도부치던 아파트촌이었던가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던 세무소였던가 민방위 교육을 받던 변두리 극장이었던가 흰봉투를 건네주던 다방의 구석 자리였던가 비행기를 갈아타던 어..
-
김광규 - 낯선 간이역시(詩)/김광규 2019. 10. 10. 17:28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간이역마다 서며가며 세 시간쯤 달려왔다 경지 정리가 안 된 먼 시골 논밭을 지나 난간 없는 다리를 건너 도룡뇽이 많이 산다는 산자락을 빙 돌아서 터널을 통과하니 저 아래 눈 덮인 계곡 한가운데 초라한 교회 종탑이 서 있는 마을 낯선 간이역에 도착했다 승하차 여행객도 별로 없고 멀리 산중턱에 조그만 암자가 보이는 곳 여기는 아무도 모를 것 같아 반세기를 이어온 인연 모두 끊어버리고 홀로 여생을 보내고 싶어지는 곳 여기서 내릴까 내려서 주저앉아 버릴까 망설이는 사이에 호각소리 울리고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츰 멀어지는 그곳 몇 번이고 되돌아보면서 나는 또다시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림 : 김태균 화백)
-
김광규 - 난초꽃시(詩)/김광규 2019. 10. 10. 17:23
마루에서 동화책 읽고 있던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할아버지는 무슨 보물이라도 보여주려는 듯 창문에 늘어진 속 커튼을 젖혔다 창턱에는 난초 화분이 네 개 그 가운데 하나가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하얀 줄기에 샛노란 꽃잎 난초꽃 향기가 그윽하지 않으냐 난초가 들으면 안 되는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말했다 화분에 심은 풀잎처럼 보이는 난초에 흥미 없는 손자 녀석은 시큰둥하게 힐끗 쳐다보고 별것 아니라는 듯 횅하니 거실로 되돌아가 멈추었던 컴퓨터 게임을 계속했다 작은 손가락이 나는 듯 움직였다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옛날의 손자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녀석이 나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림 : 김영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