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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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공터의 마음시(詩)/함민복 2019. 6. 22. 14:31
내가 살고 있는 곳에 공터가 있어 비가 오고, 토마토가 왔다 가고 서리가 오고, 고등어가 왔다 가고 눈이 오고, 번개탄이 왔다 가고 꽃소식이 오고, 물미역이 왔다 가고 당신이 살고 있는 내 마음에도 공터가 있어 당신 눈동자가 되어 바라보던 서해 바다가 출렁이고 당신에게 일러주던 명아주, 개여뀌, 가막사리, 들풀이 푸르고 수목원, 도봉산이 간간이 마음에 단풍들어 아직은 만선된 당신 그리움에 그래도 살 만하니 세월아 지금 이 공터의 마음 헐지 말아다오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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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우표시(詩)/함민복 2018. 1. 29. 15:34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 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막힌 날 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 우리가 하는 일에는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손목 잡아주던 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판셈 : 빚진 사람이 자기의 재산 전부를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내놓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지도록 함 (그림 : 이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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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라면을 먹는 아침시(詩)/함민복 2016. 10. 15. 20:14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밑반찬으로 씀바귀 맛 나는 상계동 철거 주민들의 눈물로 즉석 동치미를 담그면 매운 고추가 동동 뜬다 거기다가 똥누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다는 변비약 아락실 아침 광고하는 여자의 젓가락처럼 쫙 벌린 허벅지를 자린고비로 쳐다보기까지 하면 나의 반찬은 너무 풍성해 신문지를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 (그림 : 신대식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