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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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첫사랑시(詩)/이재무 2023. 3. 17. 21:05
어둠이 빠르게 마을의 지붕을 덮어 오던 그해 겨울 늦은 저녁의 하굣길 여학생 하나가 교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을의 솔기가 우두둑 뜯어졌다. 풀밭을 흘러가는 뱀처럼 휘어진 길이 갈지자걸음을 돌돌 말아 올리고 있었다. 종아리에서 목덜미까지 소름 꽃이 피었다. 한순간 눈빛과 눈빛이 허공에서 만나 섬광처럼 길을 밝히고 가뭇없이 사라졌다. 수면에 닿은 햇살처럼 피부에 스미던 빛 고개 들어 바라본 하늘엔 밤의 상점처럼 하나둘씩 별들이 켜지고 산에서 튀어나온 새 울음과 땅에서 돋아난 적막이 길에 쌓이고 있었다. 말없이 마음의 북 둥둥, 울리며 걷던 십 리 길 그날을 떠나온 지 수 세기 몸속엔 홍안의 소년 두근두근, 살고 있다.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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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소년이었을 때 나는시(詩)/이재무 2023. 3. 17. 20:57
소년이었을 때 나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하모니카를 불었지 이웃 마을 소녀를 그리워하며 소년이었을 때 나는 밤길을 걸으며 휘파람을 불었지 이웃 마을 소녀와의 만남을 꿈꾸며 소년이었을 때 나는 가끔 하늘을 우러러봤지 이웃 마을 소녀의 웃는 소리가 들린 듯해서 나이 들어 나는 초로의 노인이 되었네 그리움도 사랑도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버렸네 하지만 꽃 피는 봄 초록 무성한 여름 홍엽의 가을 눈 내리는 겨울 사물들은 수시로 나를 검문한다네 갓 낳은 새알처럼 두근거리는 감정을 벌써 잊었느냐고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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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봄날의 애가시(詩)/이재무 2019. 5. 3. 09:46
빛 화사하여 마음의 문지방으로 도화물결 넘쳐 와도 내 병든 몸의 가지에게로 새 잎 찾아오지 않는다 세상 밖으로 보송보송한 얼굴 내밀고는 아장아장 허공을 걸어가는 저 철없는 유년의 푸른 고집은 얼마나 환하고 눈에 부신가 하지만 저 순결한 초록의 생은 모든, 태어난 자의 숙명이 그러하듯이 먼 먼 생활의 골목과 언덕과 강물을 걷고 오르고 건너야 한다 또, 그러하는 동안 날로 두꺼워지는 몸에 상처와 무늬와 얼룩 남을 것이다 더러는 가지 떠나는 날이 되어도 산성의 시간 살아온 죄 아닌 죄로 끝내 입적의 출구 찾지 못하는 자도 있으리 (그림 : 고찬용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