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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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비의 냄새 끝에는시(詩)/이재무 2016. 5. 13. 15:35
여름비에는 냄새가 난다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멸치와 감자 우려낸 국물의 수제비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김 펄펄 나는 순댓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아카시아 밤꽃 내 흩뿌리는 비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고 갯비린내 물씬 풍기며 젖통 흔들며 그녀는 와서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물었다 뱉는다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뱉다 신작로 너머 홀연 사라지는 하지(夏至)의 여자 (그림 : 김동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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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술이나 빚어볼거나시(詩)/이재무 2016. 5. 13. 15:28
올가을엔 만사 제치고 내 고향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나 가서 철없던 유년 소풍 갔다가 보물찾기로 받은 호루라기 종일 불다가 잃은 뒤로 빛과 색 더욱 무성해진 풀밭에 빈 항아리로 누워 산그늘 덮고 한 달포 자다 깨다 하면서 저 잘난 세월에 농이나 걸까 그러다 여우비 내리걸랑 고스란히 아껴두었다 한량 같은 구름 몇 살 오른 별 몇 동동, 동치미처럼 띄워놓고 산달 앞둔 여자 둥근 배 같은 달도 푹 담가 띄우고 떼로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삼태기로 쓸어 담아 꾹꾹 눌러 쟁이고 오명가명 수박씨인 양 툭툭, 내뱉는 누룩 내 나는 사투리도 몇 함께 절여서 도수 높은 술이나 빚어볼거나 명리에 밝은 샌님들 불러들여 인사불성될 때까지 대작할거나 (그림 : 박양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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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부지깽이시(詩)/이재무 2015. 5. 16. 11:22
- 서툰 것이 아름답다 일곱 살 때였던가 뒤꼍 울 안 가마솥 옆 부지깽이 하나로 엄닌 내게 쓰기를 가르치셨다 다리엔 몇 번이고 쥐가 올랐다 뒷산 밟아온 어둠이 갈참나무 밑둥을 돌며 망설이다 지쳐 모자(母子)의 앉은키 훌쩍, 뛰어넘을 때까지 그친 적 없었다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 몇 해를 두고 화단 채송화꽃 피었다 지고...... . 내 문득 그날의 서툰 글씨 그리워 그곳으로 내달려가면 내 앉은키와 나란했던 그 시절의 나무들 팔 벌려야 안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자리 반듯하게 그을수록 더욱 삐뚤어지던 그날의 글자들이 얼굴 환한 꽃으로 피어 웃고 있었다 (그림 : 이동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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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송가(送歌)시(詩)/이재무 2015. 3. 7. 11:31
모두들 그렇게 떠났다 눈결에 눈물꽃송이 몇 개 띄운 채 입으론 쓸쓸히 웃으면서 즐거웠노라고 차마 잊을 순 없겠다는 말 바늘 끝 되어 귓속 아프게 하고 인연의 매듭 풀면서 가늘게 떠는 어깨 두어 번 두드리고 떠난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아도 돌아오리란 믿음 지키며 저무는 강가 물살에 닳은 조약돌로 앉아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밤을 맞았다 그런 날들의 먼 인가의 불빛은 물빛으로 반짝거렸고 살아온 생이 뿌리에서 떨어져나온 나뭇잎처럼 쓸쓸했다 강물은 뭍으로 올라와 생의 출발을 서두르고 재촉했지만 사소한 바람에도 낮고 축축한 울음을 낳던 갈대의 몸에 묶인 마음을 끝내 움직이진 못했다 조약돌에 이끼가 살고 물때가 제법 무성해지자 어느 먼 마을에서 온 개망초 하나 눈물인 듯 울음인 듯 내 곁에서 꽃을 피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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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내가 들꽃, 새 한 마리로 살았을 때는시(詩)/이재무 2014. 11. 7. 13:37
들녘의 들꽃으로 환히 웃을 때에는 마음의 울타리 수시로 넘나들던 하찮은 벌레 울음이며, 먼 하늘 아득한 별빛조차도 얼마나 큰, 생의 위로였던가 뒷산의 가냘픈 새 한 마리로 지저귈 때는 상수리나무 우듬지며 논길 미루나무 잔가지도 마냥 파랗게 세상 물들였는데 어느 날, 집 잃은 밤고양이로 도회 뒷골목 쏘다닐 때는 사방에서 쏘아대는 적의(敵意) 눈화살 숭숭 구멍 뚫리는 마음의 문풍지 그러나 누굴 탓하랴 몇 번씩 몸 바꿔 살아온 죄과인 것을 (그림 : 김영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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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장독대시(詩)/이재무 2014. 11. 7. 12:52
이제 다시 그처럼 깨끗한 기도 만날 수 없으리 장독대 위 정한수 담긴 흰 대접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둠은 도둑걸음으로 졸졸졸 고여오다가 흰빛에 닿으면 화들짝 놀라 내빼고는 하였다 어머니는 두 볼에 홍조 띠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천지신명께 일구월심 가족의 소원 대신 빌었다 감읍한 뒷산 나무들 자지러지게 잔가지를 흔들고 별꽃 서너 송이 고개 끄덕이며 더욱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런 새벽이면 어김없이 얼어붙은 비탈에 거푸 엎어져 무릎 까진 밤새 울음이 있었다 풀잎들은 잠에서 깨어 부스럭대고 바지런한 개울물 들을 깨우러 가고 있었다 촘촘하게 짜여진 어둠의 천 오래 입은 낡은 옷 되어 툭툭 실밥이 터질 때 야행에 지친 파리한 달빛 맨발로 걸어들어와 벌컥벌컥 마셨다 광석들 가로 지르는 서울행 기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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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구드레 나루터시(詩)/이재무 2014. 11. 7. 12:48
열정과 그리움 빠져나간 시든 몸으로 주막에 앉아 술을 마신다 파산한 친구의 서러운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저물어 소리 더욱 투명한 강물을 본다 생의 어느 한 굽이 제 목숨에 위태로운 살 떨리는 소용돌이 격정도 하류에 이르면 높낮이 없이 겸허의 물결로 잔잔하리라 오후의 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큰물 자주 다녀가는 강둑을 거처로 삼은 나무로 서서 사는 동안은 때로 줄기 떠나는 가지들의 아픈 내력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나이 들수록 마음의 마당 넓어지지 않고 뽑아낼수록 욕망의 잡초는 웃자라 무성해지는 것이냐 노을이 아름다운 날 어깨에 둘러맨 바랑에 조약돌 가득 담아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간 내 젊은 날의 여승은 지금 저쪽 생의 어느 모퉁이를 걸어가고 있을 것인가 수북이 밤은 내려서 돌아갈 노잣돈까지 털어 마시고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