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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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한강시(詩)/이재무 2013. 12. 20. 12:57
강물은 이제 범람을 모른다 좌절한 좌파처럼 추억의 한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크게 울지 않는다 내면 다스리는 자제력 갖게 된 이후 그의 표정은 늘 한결같다 그의 성난 울음 여러 번 세상 크게 들었다 놓은 적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약발 떨어진 신화 그의 분노 이제 더 이상 저 두껍고 높은 시멘트 둑 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오늘 권태의 얼굴을 하고 높낮이 없이 저렇듯 고요한 평상심, 일정한 보폭 옮기고 있다 누구도 그에게서 지혜를 읽지 않는다 손, 발톱 빠지고 부숭부숭 부은 얼굴 신음만 깊어가는, 우리에 갖힌 짐승 마주 대하며 늦은 밤 강변에 나온 불면의 사내 연민, 회한도 없이 가래 뱉고 침을 뱉는다 생활은 거듭 정직한 자를 울린다 어제의 광명 몇 줄 장식적 수사로 남아 있을 뿐 누구의 가슴 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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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갈퀴시(詩)/이재무 2013. 12. 20. 12:56
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 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속 파고들 때 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실 웃으며 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올리는 것이다 눈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 헛청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자는 갈퀴 깨워 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 슬슬 제 살처럼 긁어주고 있을 것이다 또 그걸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새싹은 갓 입학한 어린애들처럼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 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주는 마음처럼 애틋한 사랑 어디 있을까 갈퀴를 만나 진저리치는 저 살들의 환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가려워 갈퀴를 부른다 (그림 : 김경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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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좋겠다, 마량에 가면시(詩)/이재무 2013. 12. 20. 12:55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시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그림 : 정의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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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봄비시(詩)/이재무 2013. 12. 20. 12:54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한다 빗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에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젖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어린 묘목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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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시(詩)/이재무 2013. 12. 20. 12:53
아내한테 꾸중 듣고 집 나와 하릴없이 공원 배회하다가 벤치에 앉아 울리지 않는 핸드폰 폴더 괜스레 열었다 닫고 울타리 따라 환하게 핀 꽃들 바라보다가 꽃 속에서 작년 재작년 죽은 이들 웃음소리 불쑥 들려와 깜짝 놀랐다가 흘러간 옛 노래 입 속으로만 흥얼, 흥얼거리다가 떠나간 애인들 어디서 무얼 지지고 볶으며 사나 추억의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레 핸드폰 자지러진다 "아니, 싸게 들어와 밥 안 먹고 뭐해요?" 아내의 울화 어지간히 풀린 모양이다 (그림 : 이기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