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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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팽나무 쓰러, 지셨다시(詩)/이재무 2013. 12. 20. 12:51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哭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 장수가 다녀갔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그림 : 김병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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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야화시(詩)/이재무 2013. 12. 20. 12:50
한겨울 때 아니게 피어난 꽃들을 본다 조용한 울음으로 영하의 밤을 녹이는 서러운 분노의 꽃들 찬 기운 도는 한 시대의 야만과 무지의 허공 애무하는 정념(情念)의 야화 꽃들의 붉은 혀가 가슴에 와 닿을 때마다 추위로 굳어진 몸 풀려 뜨겁게 달아오른다 한겨울 때 아니게 피어나 흐느끼는, 절규하는 꽃들이 소리 없는 함성을 듣는다 거리와 광장을 적시고 마침내 국경을 넘어 번지는 꽃들의 눈물! 한겨울 때 아니게 피어난 수만 송이의 꽃 붉은 손 뻗어 내 오랜 방관의, 생의 얼룩을 닦고 문질러댄다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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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제부도시(詩)/이재무 2013. 12. 20. 12:49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그림 : 김순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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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청승시(詩)/이재무 2013. 12. 20. 12:49
몸 늙으면 마음도 함께 늙었으면 좋겠다 나이를 따로 먹은 몸과 마음의 틈바구니 청승은 불쑥 고개를 든다 코앞이 지천명인데 광기의 역사 속 아픈 사랑을 다룬 주말드라마 보며 울컥, 오늘도 선지피처럼 붉게 치미는 설움덩어리 안고 식구 몰래 복도에 나와 쓴 담배 피워문다 시간의 지우개로 거듭 지워온, 서슬 푸른 사연들 되감기로 새록새록 살아나 잠시 목메고 말라 퀭한 눈에 천천히 추억의 즙 고인다 설렘이니 그리움이니 기다림이니 밥찌꺼기만도 못한 감상 따위 애써 외면하고 살아온 세월 하, 얼마인데 철지난 옷같이 칙칙한 신파로 몸속 귀때기 파란 청년은 또 울먹이는가 젊은 날은 하는 일마다 뻔하고 시들하더니 오늘에야 절제 없이 심란하고 분주한 것인가 몸 늙으면 마음도 함께 늙었으면 좋겠다 (그림 : 강연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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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남겨진 가을시(詩)/이재무 2013. 12. 20. 12:48
움켜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半空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 난 조롱박으로 퍼 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그림 : 김경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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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석모도의 저녁시(詩)/이재무 2013. 12. 20. 12:48
비오는 날의 바다는 밴댕이회 한 접시, 도토리묵 한 사발을 내놓고 자꾸만 내게 술을 권했다 몸보다 마음이 얼큰해져서 보문사 법당에 오르며 생에 무늬를 남긴 인연들을 떠올렸다 비를 품고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저녁 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오는 날의 바다가 쓰는 생의 주름진 문장들을 읽는 동안 마음의 자루가 터져 담고 온 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갔다 얼마나 더 큰 죄를 낳아야 세상에 지고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섬에 와서도 내내 뭍을 울고 있는 내가 싫었다 자애로운 저녁은 어머니의 긴 치마가 되어 으스스 추워오는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그림 : 김도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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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시(詩)/이재무 2013. 12. 20. 12:46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누군가를 내가 울고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인가 수박 속을 수저로 파먹듯 이내 뻔히 드러나는 바닥의 달착지근한 서로의 생을 파먹다 껍데기로 버려지는 인연의 끝은 얼마나 쓸쓸하고 처참한가 변덕이 심한 사랑으로 마음의 날씨가 자주 갰다 흐렸다한 사람은 알리라 때로 사랑은 찬란한 축복이 아니라 지독한 형벌이라는 것을 침략자처럼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사랑은 점령군처럼 삶을 제 맘껏 주무르다가 생의 안쪽에 지울수 없는 화인을 찍어놓고 어느 날 홀연 도둑처럼 훌쩍 떠나버린다 여름날의 국지성 호우처럼 그것은 예고도 없이 내리거나 몰아쳐 가문 날의 미루나무 가지와 같이 수척해진 영혼을 은총처럼 지옥처럼 적시고 뒤흔든다 (그림 : 김부자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