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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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웅크린다는 것은시(詩)/나종영 2019. 9. 25. 11:26
웅크린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 고개 숙여 부끄럽다는 것 웅크린다는 것은 겁먹었다는 것 다시 말해 용기가 없어 휘었다는 것 얇은 이불 두어 채와 연탄 몇 장 가난한 세간살이에 추워서 찌들었다는 것 웅크린다는 것은 그러나 웅크린다는 것은 한 발짝 뛰기 위해 온갖 힘을 모은다는 것 다시 말해 용기를 찾아간다는 것 세상이 무너질 때 어머니는 젖먹이를 가슴에 안고 흙더미 아래 혼신의 힘으로 엎드려 어린 생명을 살려낸다네 웅크린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 가슴 속에 촛불이 일렁인다는 것 새 봄 세상의 푸른 씨앗들은 모두 다 갓난아이처럼 둥글게 웅크리고 나온다는 것 웅크린다는 것은 웅크린다는 것은 결코 살아있다는 것 (그림 : 박종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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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화엄사 흑매(黑梅)시(詩)/나종영 2015. 2. 11. 23:40
그대 안 오시니 봄비 내리고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화 아직 안 피었습니다 그대 온다던 기별에 몇번이나 옷고름을 매다 풀다 하였더니 붉은 가슴 더 붉어졌더이다 붉디붉다 못해 까만 재가 된 듯 서녁 하늘 마음만 가뭇합니다 한 사흘 내리는 봄비 그치면 그대, 고운 지단풀 밟고 오시련지요 그럼 그날 제 눈물 한 보시기 적멸보궁 가는 돌 계단에 고이 모셔두겠습니다 온다던 그대, 안 오시니 각황전 앞 흙매화 아직 안 피었습니다 이 봄비 그치기 전에 제 속 눈썹 밟고 오는 그대 버선발 소리. 화엄사(華嚴寺) :전남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황전리(黃田里)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서쪽에 있는 사찰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5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제19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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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겨울 백양사에서시(詩)/나종영 2015. 2. 11. 23:26
어느 겨울날에 나는 한 마리 버들치이었거나 얼음장 밑에서 지느러미를 흔드는 눈 맑은 빙어(氷魚)라도 되겠지 붉은 잎 다 떨어진 단풍나무 아래에서 게송을 외우는 나무물고기가 되어 있겠지 찬바람 불고 느티나무 잎사귀 다 지고 난 후 그리운 사람이 오지 않는다 해도 사랑 그 아픈 이름이 멀어진다 해도 물 위에 내리는 눈송이에 손 흔드는 물풀이 되겠지 한 마리 버들치도 빙어의 지느러미도 없는 저녁 차마 눕지 못한 풀이 되어 그대에게 가는 풍경(風磬) 소리가 되네 산새가 물고 가는 허공의 풍경 소리, 그 너머 스러지는 은빛 물비늘이 되겠네 어느 겨울날 나는 한 마리 버들치이었거나 마른나무 가지에서 기도하는 물고기가 되리 눈 내리는 겨울 백양사 징검다리 건너 길 떠나가는 나그네의 발자국이 되리 그대 등 뒤에 비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