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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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대신' 이라는 말시(詩)/김경미 2021. 10. 27. 18:42
능소화 나팔꽃 가득 핀 화단 앞에서 당신은 우는 얼굴로 몇 번이고 물었다 지난 사람 잊으려 날 대신 만나는 건 아닌가라고 봄가을을 춘추복의 같은 옷으로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두 명의 이름을 하나로 묶어 사랑한 적 없다 여름 더위 속 겨울 추위를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여름에 만난 이름을 겨울에 만난 이름에 겹쳐 사랑한 적 없다 추억에 대한 예의야 있었겠지만 나팔꽃과 나팔을 같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당신은 당신이라는 계절 당신이라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름일 뿐 당신을 대신 사랑한 적 없다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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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꽃 지는 날엔시(詩)/김경미 2021. 8. 1. 16:10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연두색 잎들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별빛 보며 세 시간 이상씩 걸어도 부족하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20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20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을 보낼수록 점점 더 산뜻해져야 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부족한 게 점점 많아져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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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엽서, 엽서시(詩)/김경미 2020. 9. 15. 18:18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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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열애들시(詩)/김경미 2019. 7. 22. 16:11
때로 마음대로 꽃소리 내는 나무들 언제 와서 언제 졌던가 절간의 새우젓 같은 안부들 이 세상 아직 내 탓에 쓸쓸해하는 이 있을까 있다며 곁에 와 눕고는 하는 불빛, 무엇인가 어느 나무에선가 멀리 있는 자격 가까이 입으며 아무나 나라를 생각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게처럼 앞으로 가는데 옆으로 멀어지네 이제는 가을 더듬이에 국운보다 단풍잎 한 채가 아픈 날들 적막에 닿았다 인생에 부산스러움이 있다고 믿지 못하는 자는 실패한 자겠지 실패가 편하면 벌써 비겁한 것일까 그럴수록 혼자 외로워 아름다우리라고 눈물, 눈물나도 끝내 기다려주고 있는 언덕 위 참으로 안아볼 만한 몸이여 마음이여 마지막 불빛은 (그림 : 우창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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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마흔에시(詩)/김경미 2019. 7. 22. 16:08
이목구비에 직업의 뼈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정물화는 원래 제 뜻으로 움직일 수 없는 화병, 해골, 꺽인 꽃, 썩은 과일들을 담는 허무의 그림이었다 건강에는 좋지만 과일 같지는 않은 식탁위 토마토식으로 살아야한다 몸 안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서로 닮아간다 구두코와 코끝이 닿는 곳도 비슷해지고 마흔개의 생일 촛불은 집과 달력을 모두 태우기에도 좋다 바위에 제 부리를 으깨고 발톱과 깃털을 찧고나면 살아온 사십년만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전설의 바위산 가는 정거장 짐 보퉁이처럼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새들 몇 년이 지났을까 슬픔도 믿어야 한다 사람에겐 서른 아홉과 마흔 두가지 나이만 있다는 듯 정거장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든다 (그림 : 박운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