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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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그리운 심야시(詩)/김경미 2016. 7. 17. 19:28
그래 다른 생은 잘 있던지 검정양복의 연인처럼 그리운 밤 카페들과 눈물처럼 글썽이던 막차의 차창들은 철제 셔터 내려진 어두운 상점들은 붕대같이 하얗게 빈 도로는 정든 미치광이 친구들 무청같은 새벽거리는 있기는 정말 있던지 아침마다 조용히 이불 밑그대로이던 네 흰 발목의 검정 갈기는 정말담을 넘었던 것인지 실밥처럼 흰 눈 쏟아지는밤거리를 달리기는 달렸던 것인지 달려 다른 곳 다른시간이 정말있기는 있었던 것인지 나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살아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한 다른 창 밖 다른 생이 (그림 : 박선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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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누가 사는 것일까시(詩)/김경미 2016. 7. 17. 19:19
1 약속시간 삼십 분을 지나서 연락된 모두가 모였다 우리는 국화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웃었다 불참한 이도, 더 와야 할 이도 없었다 식사와 담소가 달그락대고 마음들 더욱 당겨앉는데 문득 고개가 들린다 아무래도 누가 안 온 것 같다 잠깐씩 말 끊길 때마다 꼭 와야 할 사람 안 온 듯 출입문을 본다 나만이 아니다 다들 한 번씩 아무래도 누가 덜 온 것 같아 다 모인 친형제들 같은데 왜 자꾸 누군가가 빠진 것 같지? 한 번씩들 말하며 두 시간쯤 지났다 여전히 제비꽃들 처럼 즐거운데 웃다가 또 문득 입들을 다문다 아무래도 누가 먼저 일어나 간 것 같아 꼭 있어야 할 누가 서운케도 먼저 가버려 맥이 조금씩 빠지는 것 같아 자꾸 둘러본다 2 누굴까 누가 사는 것일까 늘 안 오고 있다가 먼저 간 빈자리 사람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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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명함에 쓴 편지시(詩)/김경미 2016. 7. 17. 19:16
눈 아주 많이 내리던 날이었지요 여의도 한 빌딩 지하에서 마주쳤지요 십 몇년만인가 아득한데 아직도 혼자라며 웃었지요 걱정 스치는 이쪽 눈빛에 괜찮아요, 괜찮아요 참 번듯한 명함을 내밀었지요 귀찮고 성가신 사소함들에마다 찾으라 했지요 여름 햇빛속 걷다 가방이 귀찮을때, 손톱 밑에 가시박혔을때, 비싼 음식이 맛없을때, 돈 꾸고갚기 싫을때, 그리고 또, 소녀인 양 웃는데 문득 흰 나비떼들 창을 넘어들고 따라들어온 바람은 서늘했지요 신사의 악수는 청량했지요 돌아와 베란다 저 밑, 공사 끝나가는 성당을 봤지요 봄 되면 가서 많이 뉘우치리라 했던 곳이지요 붉은 벽돌 위에 쌓은 흰 눈이 꼭남자의 울어 붉던 눈 같지만 폐인 된다더니 안 된 그대 그 명함 눈 속으로 날려보냈지요 마당에 선 성모마리아, 두 손 벌려 그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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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쓸쓸한 날에시(詩)/김경미 2016. 7. 17. 19:12
쪽빛 엽서를 쓰고 싶네 몇 다발 정맥을 풀어 견딜 수 없는 안부와 그리움의 목례를 쓰고 또 쓰고 모조리 찢고 다시 또 쓰고 갑자기 퍼붓는 함박눈 사이로 자줏빛 달개비들이 얼어 죽은 길로 동백 꽃송이 검은 머리카락에 곱게 싸들고 지워진 길을 다시 가겠네 흰 눈발 위를 걷고 또 걸어 성급히 당신에게로 이제 곧 가고 싶네 성실한 답장을 받겠네 문 열어보면 거기 당신의 소인 쌓인 인주빛 언덕에 기대 서로를 옥바라지하며 해후의 글씨를 다듬고 다듬는 그리운, 그리운 당신과 우리들 (그림 : 김한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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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회귀시(詩)/김경미 2016. 5. 4. 13:34
누가 또 어디쯤서 나를 저버리나 보다 마음 속 햇빛 많은 나뭇잎들 폭설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수박향내 애틋하던 저녁 산책길이 돌변했다 이번엔 남의 집 대문앞이 아니다 누드화 같은 이 바다로 바다로 누가 또 날 버리나 보다 잡을 것 오직 은박지 같은 물뿐이다 소리치는 것도 부끄럽다 망망대해 혼자뿐인데 누군가 나타나도 원수가 될 것이다 기다림 간절했으므로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렇게는 아니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하라고 현생의 나를 만난 내 생에 사과라도 남기고 싶었으나 물천장 위 비바람에 섞여 내리는 주황빛 저녁이 성당의 색유리 가득한 성가 같아 붉은 점박이 나리꽃처럼 걸핏하면 끼얹어지는 이 침수 이 상실감을, 하긴 나는 사랑하던가 떠나고 없는 고요할 물 속 묵묵함을 내심 더 바랬던가 늘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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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약속시(詩)/김경미 2016. 4. 28. 18:14
무량사 가자시네요 이제 스물아홉의 당신 아직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고 깨도 좋은 나이 잠시 나도 오래전 그 나이인 줄 알아 웃었나봐요 뻔뻔키보단 서글프죠 늦은 미혹(迷惑) 흰 벚꽃들 얼른 지고 차라리 당신 발이라도 다쳤으면 거기 꽃그늘 아래 어린 여자들 보면 부끄럽기나 할 테니 스물아홉 살의 당신 쪽이 약속 하나쯤 깨도 무량사는 여전히 거기 있을 테고 난 차라리 혼자 가지요 미혹의 거품 가만히 맥주잔처럼 기울여 거기 마당 한켠에 따라버리고 못 지켰던 내 스물 몇 살의 약속들 곁에 따라버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들끼리 몇 생을 거듭하여 갚으라다가 어느 생엔가는 나, 열아홉쯤으로 무량사 가자고 늙은 당신께 가자구요 지키지 못한 약속들 때문에 봄은 계속될 거구요 무량사(無量寺)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