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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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수첩시(詩)/김경미 2016. 11. 25. 17:55
도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기를 잊어버려 연인도 바다도 다 그냥 지나쳤다 발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가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 내내 양파가 짓물렀다 토끼똥이 한가득씩 어깨로 쏟아졌다 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잊어버려 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슬픔만은 어디에 적어 두지 않아도 목공소 같은 몇만 번의 저녁과 갓 낳은 계란 같은 눈물 자국을 어디에고 남기고 또 남긴다 (그림 : 김선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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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 1시(詩)/김경미 2016. 7. 18. 10:48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세컨드,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언제나 나중,인 홍길동 같은 서자,인 변방,인부적합,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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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 2시(詩)/김경미 2016. 7. 18. 10:47
또한 목숨의 물릴 수 없는 단 하나의 정혼자. 그리하여 언제나 목숨을 세컨드. 그 기약 없는 지위. 기어이 이별해버리게 될,. 설렘과 체념이 다리를 섞는. 아무리 속여도 끝내 넘볼 수 없는 조강지처 그 천생연분 버티는, 넘보는 순간 끝장인, 그리하여 언제나 나날을 두 집 살림으로 남몰래 서럽고 파릇파릇 격렬케 하는, 빈 집처럼 외롭고 헛헛게 하는. 들키면 머리채 뽑히게 하는, 그리하여 그날까지, 이곳에서의 모든 생, 세컨드,. 그 첩질이게 하는, 생의 본처, 그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영원한 언약, 배신 없는 사랑, 그 영광의 오직 본댁, 은 죽음, 인 것을 (그림 : 김현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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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 3시(詩)/김경미 2016. 7. 18. 10:46
서로가 첫번째인 혼인 하고 아이 낳고 부부라 불리지만 왠지 항상 당신의 첩인 것만 같지요 당신도 항상 나의 정부인 것만 같지요 당신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본부인이 이 하늘 밑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어 당신 마음의 제일 좋은 곳을 발라먹고 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내 본남편 있어 귓속에 집을 짓고 끝없이 훌훌 떠날 것을 속삭이는 듯하지요 그러나 모두들 한여름 흰 치잣빛 낮잠처럼 어쩌면 그렇게 태연한 연분의 표정들인지 가을 따라 눈썹 몇 번쯤 깜박이면 시야도 창호지 너머처럼 뿌옇게 스러져 스러지다 촛불 탁 엎어지면, 그제야 본댁으로들 각각 돌아가, 삶, 이라는 불륜, 에 대해 무슨 용서와 고통을 치를지, 보지 못한 태생 저편의 본가가 살수록 그립고 궁금치 않은지요 (그림 : 김현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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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 4시(詩)/김경미 2016. 7. 18. 10:44
- 연애편지를 위하여 무언가 잊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지요 -개나리꽃 환합니다 사랑하는 그대 봄볕처럼 겨웁던 눈빛은 여전한지요 혹은 죽었는지요. 아주 긴 총을 들고 나비처럼 사뿐 세상의 옥상에 올라가고 싶지요 - 당신이 준 연보랏빛 스위터를 찻집에 잊고 나왔었죠 창 밖이 온통 벚꽃의 일생 같기에요. 올라가서 그대 머리에 총구를 조준하고 싶지요 정확히 - 사람에게 그 무엇 있어 그토록 열렬히 서로 넝쿨 오르고 그 무엇 있어 고양이 발처럼 돌아서고 대체 사람들에게 그 무엇 있어 생에게 대체 그 무엇 있어 찻집 유리창 너머로 그대 얼굴이 마악 부서지는군요 사람들이 웅성대네요 무언가 잊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었지요 - 싱싱하고 맑은 벚꽃색 손톱같이 자라리라던. 벚꽃같이 짧게 깎아내버린 사랑 봉숭아물인지 핏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