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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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어떤 여름 저녁에시(詩)/김경미 2019. 7. 22. 16:06
한여름, 선풍기에서 나오는 약풍 혹은 미풍이란 글자 처음 사랑의 편지 받았던 촉감일 때 있다 크게 속상하고 지친 울음 거두고 마악 여는 문 경첩에서 흰 바다 갈매기들 바닷물 닿을 듯 낮게 마중 나올 때가 있다 극도로 줄이거나 높인 음악 소리 속 가본 기억 없는 모르코사막의 터번 두른 낙타 눈 아픈 모래바람 앞서 가려줄 때가 있다 유리창 너머 시원한 액자 속 흰 양떼구름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 처럼 갈래머리 계집아이의 어린 설레임 되감아줄 때 있다 어떤 여름 저녁, 그 모든 것들 한꺼번에 밀려나와 더위보다 큰 녹색 수박의 무수한 조각배들 잊을 수 없는 석양의 출항을 시작할 때가 있다. (그림 : 김정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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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스피커시(詩)/김경미 2019. 7. 22. 16:00
영어는 네이티브 스피커에게 배우고 설득은 반값의 행상트럭 스피커에게 배운다 마을버스 승차요령은 언덕길에서 배우고 수영은 바닥으로부터 배운다 만남은 후회에서 배운다 웃음은 스피커로부터 배우면 안된다 동네방네 너무 크게 웃고 나면 꼭 불길한 보복이 찾아든다 그날, 잘난 척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 무시당할까 봐 먼저 손썼던 거다 스무 살이 넘도록 배운 게 그것뿐이었으니까 민박집에서는 벌레와 유리창을 배우고 이사는 베란다에서 배우고 노래는 알콜 냄새에서 배우고 그리움은 칫솔질에서 배우고 뱉으면 치약거품에 피가 좀 섞여야 한다 미안하다, 사과는 서커스에서 배우고 서류에서는 각을 배우고 행운에서는 풀 뜯기를 배우고 수련과 부레옥잠에서는 날개를 배우고 침에서는 얼굴을 배우고 발등에서는 핑계를 배우고 거기 말귀 어두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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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연표(年表)시(詩)/김경미 2019. 7. 22. 15:55
그가 내 가슴에 복숭아를 던지던 구석기시대가 있었고 내가 그의 가슴을 찌르던 철의 시대도 있었다 연잎처럼 큰 편지가 소리 없이 타버리던 종이와 성냥의 시대가 있었고 어금니가 아픈 탈락과 취소의 시대도 있었다 긴 복도에는 늘 목례와 악수와 끄트머리 어둠과 귀신이 서 있었다 빙하기가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왔다 가는 사이에 나무들은 톱밥이 되거나 새가 되고 나는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 되었지만 그래서 추위를 더 잘 피했다 매일 뭐든 옮겨놔야 살 것 같던 변덕의 시대도 가고 나면 꼼짝도 않는 추억들을 다 무슨 수로 막겠는가 잡을 수 있었던 것들도 미끄러져 나가는 시간의 시대는 언제까지나 되풀이되겠지만 지금은 혹은 검정 비닐의 시대 안에 든 것들을 다 허름하게 만드는 (그림 : 우창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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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시(詩)/김경미 2019. 7. 22. 15:43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이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디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그림 : 이기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