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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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엽서, 엽서시(詩)/김경미 2016. 1. 13. 10:36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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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맨드라미와 나시(詩)/김경미 2015. 12. 14. 20:14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면 두통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 온통 붉다 못해 검다 곧 서리 내리고 실내엔 생선 굽는 냄새 길에는 양말 장수 가득할 텐데 달력을 태우고 달걀을 깨고 커튼에 커튼을 덧대고 혀의 온도를 올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간다 가을은 떠나고 오늘 밤 우리는 함께 울 것이다 (그림 : 진상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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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시(詩)/김경미 2015. 9. 4. 00:57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일이다 포플러나무가 떠밀고 시외버스가 부추기는 일이다 읍내 우체국 옆 철물점 싸리비와 고무호스를 사고 싶다 청춘의 그 방과 마당을 다시 청소하고 싶다 리어카 위 잔뜩 쌓인 붉은 생고기들 그 피가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고 청춘에 배웠던 관계들 언제나 들어오지 마시오 써 있던 풀밭들 늘 지나치던 보석상 주인은 두 다리가 없었다 머리 위 구름에서는 언제나 푸성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차도 시간이 가지 않던 시간이 오지 않던 하늘에 1년 내내 뜯어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건 좌절과 실패라는 것도 청춘의 짓이었다 구름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고개가 부러졌던 스물셋 설욕도 못한 스물여섯 살의 9월 새벽 기차에서 내리면 늘 바닷속이었던 하루에 소매치기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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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식사법시(詩)/김경미 2015. 7. 4. 11:09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들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져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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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봄, 무량사시(詩)/김경미 2015. 3. 9. 10:55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물몇살의 기타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 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물몇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무량사(無量寺)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에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