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윤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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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비에게 듣다시(詩)/윤성택 2022. 6. 28. 09:47
귀를 대보아도 추억은 난청일 때가 많다 몰아쳤다가 흩어지는 점들의 외곽 가로등은 불빛을 뿌리며 척박한 거리를 키웠다 몇몇 약속은 필라멘트처럼 새벽이 되곤 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온기를 잊지 못한다 흐르는 얼룩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유리창은 인상파처럼 집착을 뭉갠다는 사실, 두고 온 날들이 비를 흠뻑 맞고 여전히 가는 빗소리로 턴테이블을 돈다 나는 지하 카페 뒷좌석이거나 눅눅하게 젖어버린 노트, 그러다 뒤집힌 우산이 버티는 후미진 방치 불행하게도 오늘은 스피커만큼 현현하다 바닥 곳곳 둥근 테두리 생겨나고 손잡이를 움직이자 소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완전한 소음이 될 때까지 시간은 리시버를 구름에 꽂는다 (그림 : 이종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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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꽃이 나의 계절을 찾아와시(詩)/윤성택 2020. 6. 30. 21:04
꽃이 나의 계절을 찾아와 한 시절 피다 간 것을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사랑은, 제 계절을 위해 하나의 꽃에 한 시절 열렬했다는 거겠지요 그러나 사랑은 이별을 기다려 본 적 없고 이별은 사랑을 기약할 줄 모르니 우리는 각자의 색으로 피어 들녘을 견딜 뿐입니다 무시로 피었다 저무는 사람이 향기로 젖는 몇 날, 꽃은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햇볕에 씻느라 색을 풀어놓았습니다 살면서 몇 번의 계절이 꽃을 앓을까 싶어 조심조심 밤을 걷습니다 시간이 깃들어 기꺼이 생기를 기록하는 시듦, 그 사이 누군가 한낮이 되었습니다 꽃이 나의 계절을 찾아와 한 시절 피다 간 것을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꽃은, 열렬히 한 시절 햇볕을 내게 준 것입니다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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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정류장시(詩)/윤성택 2017. 6. 25. 19:34
이 눈부신 햇빛의 제목 잎잎은 승차권 같은 바코드를 잎맥에 입혀 환승 중이다 실눈이 좁게 우회하는 길 밖으로 꽃들을 부빈다 서로에게 흔들리면서 목걸이처럼 찰랑이는 오후 정류장은 종일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래전 빗방울 습기 한 점이 나였던 적이 있다 나는 그곳을 다녀간 내 수많은 성향이다 햇빛은 습기를 공중에 적는다 기억할수록 점점 타인이 많아진다 버스에 올라 정류장 푯말을 바라볼 때 텅 빈 시간의 기압에서 느껴지는 비의 냄새, 어느 길에서는 먹빛 구름이 차창이다 사랑에 대해 점괘를 확신하고 있으면 정류장에서 그날은 비가 내린다 (그림 : 권대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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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비망록시(詩)/윤성택 2017. 6. 25. 19:32
시간을 겹겹 접으니 견고하게 뚫립니다 생생한 과거를 이제 펼칠 수 있습니다 나의 과거에 이르는 속성은 당신에 의한 것이니 내 청춘은 고백에 가깝습니다 이 불안하고 어리숙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무모한 기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이 사라졌다고 이해하겠습니다 한때의 결의도 사랑도 헌 책에서 뜯겨져나간 속지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곳의 공기에게 예감은 선물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기억이란 운명을 은유하면서 일생을 떠돌게 마련이니까요 태연한 그 여백을 오늘이라고 적겠습니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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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저녁의 질감시(詩)/윤성택 2017. 6. 25. 19:22
새들은 아무도 기약하지 않는 곳에 날아가 빈집을 낳는다 침목의 결이 커튼처럼 역과 역에 접히면 민박집 창이 열렸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날의 연한을 모르는 낙서와 같은 고백이 빈방에 남아 시들어가는 노을을 걸어둔다 수첩 속에는 휘청거리는 문장들이 닻을 내리고 저녁의 심지 같은 쓸쓸한 몽상만이 끝없이 흔들린다 가까이 만지기 위해 손 내미는 회색 테트라포드, 삐죽빼죽한 새벽이 부서지고 또 부서져도 나는 내 빈틈으로 드나들던 슬픔을 알지 못한다 등대는 하얀 기둥을 열었다 닫으며 물결에 열주를 드리운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그림자들이 조난신호처럼 불빛을 축조하는 밤 나는 심해로 가라앉는 피아노를 생각한다 검은 건반의 음은 더 이상 항해하지 않는다 썰물이 휩쓸고 간 해변에 장갑이 떠밀려가고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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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신파시(詩)/윤성택 2017. 6. 25. 19:18
때로는 삼류 쪽으로 에돌아야 인생이 신파스러워 신신파스처럼 욱신욱신 열이 난다 순정을 척 떼어내자 소나기가 내리고 일제히 귓속의 맨홀로 고백이 휘감겨 들어간다 청춘에서 청춘까지 비릿한 것이 많아서 비밀의 수위에는 밤들이 넘치고 편지들이 떠다닌다 뜨거운 이마에 잠시라도 머물 것 같은 입술, 알싸한 그 접착을 지금도 맹세한다 내내 뜨거울 것, 그리고 내내 얼얼할 것 신파란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을 쏟는 것이므로 누군가 나의 눈으로 너를 본다 오래도록, 우리의 날들이 철 지난 전단지처럼 붙어 있다 아직도, 열이 난다 (그림 : 장용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