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윤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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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그릇에 관하여시(詩)/윤성택 2015. 10. 2. 21:41
얘야, 그릇은 담아내는 것보다 비워내는 것이 인생살이란다 어머니의 손은 젖을대로 젖어서 좀처럼 마를 것 같지 않다 젖은 손을 맞잡고 문득 펴 보았을 때 빈 손바닥 강줄기로 흐르는 손금 긴 여행인 듯 패여 왔구나 접시들은 더러움을 나눠 가지며 조금씩 깨끗해진다 헹궈낸 접시를 마른 행주로 닦아내는 어머니의 잔손질, 햇살도 꺾여 차곡차곡 접시에 쌓인다 왜 어머니는 오래된 그릇을 버리지 못했을까 환한 잇몸의 그릇들 촘촘히 포개진다 나도 저 그릇처럼 닦아졌던가 말없이 어머니는 눈물 같은 물기만 정성스레 닦아낸다 그릇 하나 깨끗하게 찬장으로 올라간다 (그림 : 장민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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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오늘의 커피시(詩)/윤성택 2015. 9. 20. 12:42
갓 내린 어둠이 진해지는 경우란 추억의 온도에서뿐이다 커피향처럼 저녁놀이 번지는 건 모든 길을 이끌고 온 오후가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이었기 때문이다 식은 그늘 속으로 어느덧 생각이 쌓이고 다 지난 일이다 싶은 별이 자꾸만 쓴맛처럼 밤하늘을 맴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각자의 깊이에서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되어 그 길에 번져 있을 것이다 공중에서 말라가는 낙엽 곁으로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분다 솨르르솨르르 흩어져내리는 잎들 가을은 커피잔 둘레로 퍼지는 거품처럼 도로턱에 낙엽을 밀어보낸다 차 한 대 지나칠 때마다 매번 인연이 그러하였으니 한 잔 그늘이 깊고 쓸쓸하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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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안부(安否)시(詩)/윤성택 2015. 7. 28. 11:10
밤은 파랗고 생각은 굴참나무 밑입니다. 하루가 쓸쓸한 어느 간이역이어서 차를 세우고 풍경이 차창을 내립니다, 설핏 스치면 그새 저녁놀입니다. 어둑해지는 사위 속에서 붉은 신호등만 바라봅니다. 기다리는 시간. 그 짧은 순간이 일생이라면 어떨까요. 기억이 가지는 섬세한 숨소리를 생각합니다. 늘 숨쉬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 숨이 턱 막히며 그 기억의 한 가운데 몸을 데려가 놓곤 하지요. 그러니 세월은 여러 가지 기다림을 잇대어 누빈 피륙만 같습니다. 꿈은 삶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꿈으로 환기되기 위해서 마련해 놓은 시간이 아닌지요. 감정의, 격정의 끝점에서 세상은 잠시 멈추고, 저녁해가 느리게 그 호흡을 끌어당깁니다. 이렇게 자판이 나를 앞서 갑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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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해후시(詩)/윤성택 2014. 2. 23. 16:27
꼭 한번은 누구도 모르게 자신의 일생을 만나고 간 사람에게 타인을 입힌다, 다시 만난 듯 인상이 호감을 조금씩 떼어내며 서로의 구면이 된다 폭우처럼 밀려오는 말(言)의 기압골에 표류하는 소리 소리들 금을 새기듯 번쩍번쩍 의미가 얼굴을 바꾸는 중이다 이때 가장 빠르게 눈동자로 옮긴 둥긂에서 빛이 스러진다 기억의 뒷면에는 언제나 터널이 있다 그곳으로부터 여행 온 사람이 지금 태연하게 웃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안은 그대로 독하다 아무도 모르는 내가 되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눈을 부릅뜨는 것보다 때로 그 사람의 눈에서 처음 보는 나를 쓸쓸하게 떠나보내주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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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시(詩)/윤성택 2014. 1. 17. 18:59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봄을 옮기지 않겠노라고 원래 있었던 자리가 그대가 있었던 자리였노라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 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그림 : 김명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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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술잔의 지문시(詩)/윤성택 2014. 1. 17. 18:57
소주잔 속 지문의 소용돌이가 인다 살갗은 타원은하처럼 유리와 밀착되어 있다 그 중심에서 잔은 자전해 오고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익히며 조금씩 얼굴이 붉어져갔다 포장마차가 있는 골목은 불시착한 행성의 길, 시시각각 달라지는 중력 때문인가 문득 어지럽다 가로등은 혜성처럼 꼬리가 길고 숨 밖으로 알코올이 푹푹 증발한다 몇 개 기억이 지워진 채 나는 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며칠 후 택시에 두고 내린 지갑에서 주민등록증만 우편함으로 되돌아왔다 뒷면의 지문을 들여다보았다 수없이 떠났으나 되돌아올 수밖에 없던 고향이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그 은하였다 (그림 : 이청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