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윤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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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밤기차시(詩)/윤성택 2014. 1. 17. 18:49
나, 밤기차를 탔었다 검은 산을 하나씩 돌려 세워 보낼 때마다 덜컹거리는 기차는 사선으로 몸을 틀었다 별빛은 조금씩 하늘을 나눠가졌다 종착역으로 향하는 기차는 인생을 닮았다 하루하루 세상에 침목을 대고 나 태어나자마자 이 길을 따라 왔다 빠르게 흐르는 어둠 너머 가로등 속 누군가의 고단한 길이 들어 있었다 간이역처럼 나를 스쳐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은 세상의 가장 바깥이었다 함부로 내려설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 기차표를 들여다보았다 가는 곳이 낯설어 지고 있었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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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주유소시(詩)/윤성택 2014. 1. 17. 18:47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 (그림 : 이수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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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너에게 가는 길시(詩)/윤성택 2014. 1. 17. 18:43
노을이 약봉지처럼 터지고 있었다 몸살을 앓아내는 것인지 갈대들은 야윈 채로 서성거렸다 사는 게 늘 초행길이어서 능선이 선명할수록 그 아래는 덧칠할 수 없는 생의 여백이었다 저녁 해가 안간힘으로 길을 끌어다 잇대어도 부재중인 것들, 하늘 어딘가 별빛처럼 문자메시지가 떴을까 가야할 길을 아는 저녁놀을 볼 때마다 단 한 번 선택으로 엇갈렸던 길들이 궁금해졌다 기어이 이 길을 걸어 너에게 가자고 한 번 믿어보자고 걷는 한때, 산이 지나온 아픈 길을 당기며 천천히 돌아눕고 있었다 (그림 : 박영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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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청춘은 간다시(詩)/윤성택 2014. 1. 17. 18:40
내 청춘은 가스통처럼 옮겨다녔다 비바람이 헬맷을 거세게 흘러갈 때 달리지 않는 것들은 미끄러운 시선 밖으로 줄기차게 밀려난다 색색을 늘어뜨린 네온간판들 번번이 골목골목으로 사라진다 길은 인연같이 뻗어와 막다른 곳으로 쓸쓸히 흩어지는 것을 가스통을 짊어진 좁은 골목길에서 보았다 헤드라이트가 빠르게 난간을 더듬자 빗줄기가 뇌관처럼 즐비하다 턱을 바싹 당긴 채 굉음으로 앞바퀴 들어 달리다보면 나를 앞서간 사랑까지 가닿을 수 있을까 흘깃, 덜컹거리는 가스통을 돌아본다 매여 있는 것은 늘 괴롭다 가끔씩 물보라로 튀어 오르는 잔돌멩이들 길의 방점처럼 귀퉁이에 찍힌다 일순 번개가 치울린다 몸을 납작 엎드린다 발기된 엔진이 뜨겁다 생(生) 위에 길들여진 길이 끝날지라도 점화되지 못한 청춘을 싣고 나는야 폭탄처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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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쓸쓸한 연애시(詩)/윤성택 2014. 1. 17. 18:37
백사장 입구 철 지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얽매여 군데군데 찢겨진 채였다 기어이 그녀는 바다에 와서 울었다 버려진 슬리퍼 한 짝과 라면봉지, 둥근 병 조각조차 추억의 이정표였을까 해질 녘 바위에 앉아 캔맥주 마개를 뜯을 때 들리는 파도소리, 벌겋게 취한 것은서쪽으로 난 모든 창들이어서 그 인력권 안으로 포말이 일었다 유효기간 지난 플래카드처럼 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치욕이냐고, 상처의 끈을 풀어준다면 금방이라도 막다른 곳으로 사라질 것 같은 그녀 왜 한줌 알약 같은 조가비를 모아 민박집 창문에 놓았을까, 창 모서리까지 밀물 드는 방에서 우리는 알몸을 기댔다 낡은 홑이불의 꽃들이 저녁내 파도 위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그녀가 잠든 사이, 밖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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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비에게 쓰다시(詩)/윤성택 2014. 1. 17. 18:34
버스는 아가미를 열고 우산 몇을 띄워놓네 다음 정차 역까지 단숨에 가려는 듯 바퀴마다 지느러미 같은 물길이 돋네 떠날 수 없는 정류푯말만 발밑 꽁초를 길가로 밀어 넣네 밤은 곳곳의 네온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고, 푸르다가 붉다가 점멸하는 자음만으로 도시를 읽네 건너편 창을 훑고 내려오는 자동차불빛 밀물처럼 모서리에서 부서지네 파도소리가 밤새 저리 뒤척이며 경적을 건져낼 것이네 한 떼의 은빛 치어가 가로등으로 몰려가네 살 오른 빗방울이 창문으로 수없이 입질을 해오지만 내가 던진 찌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네 이렇게 텅 빈 밤이면 그립다던가 보고 싶다던가 모스부호처럼 문자메시지를 타전하고 싶네 살아가다보면 한번쯤 좌표를 잃는 것인지 이 막막한 표류를 어쩌지 못하네 무엇이든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렇게 일순간 떠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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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실종시(詩)/윤성택 2014. 1. 17. 18:30
뒷걸음으로 지하철 의자에 앉는다 지나는 낯빛에서 이끌려오는 윤곽이 흐릿하다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지만 번번이 전송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전생 어딘가 마주친 것 같은 사람들, 지상의 계단을 바삐 오르내리고 있다 길을 잃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어두운 터널과 터널 사이 그 빈 공간까지 바람이 날리고 상여같이 환한 전철이 들어온다 발걸음이 예서제서 쏟아졌으나 좀처럼 타고 싶지 않다 여기가 세상을 가둔 종점이던가, 출입문이 덜컹 닫히자 둥근 고리들 차례차례 허공에제 몸을 증거처럼 끼워 넣는다 손목시계를 보다가 플랫폼을 거닐다가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다가 어둑한 구석에 다시 앉는다 누군가 애달프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일기장, 편지, 메모들은 건너편 붉은 소화전 속 비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