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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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영 - 겨울 화진포시(詩)/박제영 2022. 6. 13. 16:40
폭우가 그쳤다고 음악이 끝났다고 불을 끄고 문을 닫아버린 당신은 이제 세상에 없는 문장입니까 표류하던 질문이 기진맥진 와닿은 정어리 떼처럼 몰려온 파도가 진저리치는 여기는 화진입니다 주어도 목적어도 상실한 불구의 문장들 하얗게 부서지고 의미를 잃은 단어들마저 모두 파랗게 부서지고 간신히 화진마저 잊을 무렵이면 마침내 완전히 잊을 겁니다 보세요 눈 내리는 화진을 진창이 되어버린 비문을 덮으며 펄펄 마침표를 찍는 저 화진을 마침내 이별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림 : 김세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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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영 - 가는 날이 장날시(詩)/박제영 2022. 1. 4. 16:54
장똘뱅이들은 본디 집도 고향도 없니라 이 장에서 사흘 살고 저 장에서 닷새 살고 평생을 번지 없이 살았니라 그리 한 생이 갔니라 아라리 고갯길이 뭔 줄 아나 애시당초 길이 아니었네라 장똘뱅이들이 수수백 년 밟아 맹근 길이네라 그니들이 아라리 부르며 넘다 눕다 생긴 고갯길 그기 아라리 고개니라 신식길이 나기 전엔 말이다 엔간한 고갯길은 다 그니들이 맹근기라 방방곡곡 고개란 고개는 다 아리라고개였니라 우리 강생이 북망고개가 뭔 줄 아나 이 할미가 넘을 마지막 아라리 고개니라 평생 떠돌다이제 재우 번지 찾아 넘는 것이니 할미는 원도 한도 없니라 가는 날이 장날인데 장똘뱅이가 무얼 더 바라겠노 (그림 : 김의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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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영 -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시(詩)/박제영 2021. 10. 30. 11:43
착하다 사람 좋다 그기 다 욕인기라 사람 알로 보고 하는 말인 기라 겉으로는 사람 좋다 착하다 하믄서 속으로는 저 축구(芻狗) 저 등신 그러는 기다 우리 강생이 등신이 뭔 줄 아나 제사 때 쓰고 버리는 짚강생이가 바로 등신인 기라 사람 축에도 못 끼고 귀신 축에도 못 끼는 니 할배가 그런 등신이었니라 천하제일로 착한 등신이었니라 세상에 두억시니가 천지삐까린데 지 혼자 착하믄 뭐하노 니는 그리 물러 터지면 안 되니라 사람 구실을 하려믄 자고로 모질고 독해야 하니라 길게 말할 게 뭐 있노 우리 강생이 그저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되니라 하모 그라믄 되니라! (그림 : 송태관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