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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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 가장 낮은, 더 아름다운시(詩)/배창환 2019. 10. 18. 09:11
교정 측백나무 그늘에 나서 햇살 한 줌 못 얻어먹어 저런 녀석도 꽃 피울 수 있을까 싶도록 쬐끄만한 몸 비비 틀리고 꼬이었어도 귀는 있는 대로 다 열어두고 오가는 발소리 숨소리 헤아리더니 세월없이 저 홀로 딴청이더니 찬 서리 내리고 어깨에 단풍 지자 엇 뜨거라, 고개 번쩍 쳐들고 있다 늦었다 싶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죽을 힘 다하여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 반짝 피워내는, 가장 낮은 그늘에 살아 있는 것들이 그러하듯이 내일 당장 떠날 깝시라도 오늘 마지막 숨 태워 정한 빛 뿜어내는, 그래서 눈물겹게 더 아름다운 늦가을 국화 깝시라도 : ~망정이라도(경상도말) (그림 : 조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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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 호반의 아침시(詩)/배창환 2019. 9. 15. 12:27
나는 들었네 한걸음 앞도 막혀 있는 안개 속에서 내 가슴 찰랑거리며 와닿는 호수의 잔 물결소리 아득한 곳으로부터 밀려와서 새벽잠 덜 깬 내 모래밭을 철썩철썩 때리는 낯익은 너의 소리를 밤은 오직 지나기 위해 있었지 물총새는 일어나 포물곡선으로 허공을 가르며 먹이사슬로 들고 나는 또 보았네 물가 어린 느티와 싸리순 사이를 오가며 팽팽한 강철집을 짓는 작은 거미들의 눈부신 노동을 이 지상의 가장 깊은 골짝을 스쳐가는 바람조차 저 혼자 살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며 새벽마다 더 낮은 땅으로 내려서는 수면의 흔적은 물가 암반에 살아온 자취를 남기는데 키큰 갈대밭 부근에서 밤새 추위를 떨며 서성이던 별무리는 지금 돌아오는 햇살에 들킨 내 발자국처럼 어지러이 흩어지고 없네 별들은 어디로 떠내려간 걸까 안개는 또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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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 아름다움에 대하여시(詩)/배창환 2019. 9. 15. 12:22
눈 덮힌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19년만에 불모의 땅 대구 일원에 내린 눈도 역시 아름다웠다. 기차를 타고 내려올수록 세상을 더 깊고 두껍게 덮어오는 하얀 눈발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평등하게 겹겹이 덮어버리는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손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세상에서 발자욱을 찍어내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전에는 사람이란 그저 작고 추하기만 한 줄 알았다. 나이 먹어 불혹에 한 발 다가선 지금 내게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이 더 깊이 이해된다. 핍박받는 사람이 핍박을 이겨내려고 싸우면서도 가장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 그걸 나는 조금씩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눈 내리는 세상만큼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한 것이고 태어나길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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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 그 겨울 선창 풍경시(詩)/배창환 2019. 9. 15. 12:15
― 낮달이 있는 희끄무레한 구름 사이로 낮달이 하나, 떠 있었다 이중섭이 날마다 나와 안아보던 달, 물 건너 친정 보낸 일본인 아내가 되기도 하고 꿈에나 보던 아이들이 되기도 했을 그 선창의 허연 달이 하루에 두 번 끄덕끄떡 했다던 영도다리 아래, 바다쪽으로 살짝 비탈진 내리막길 자갈치 들머리, 50년대 국산영화 세트장 같은, 연안沿岸 골목길 축대 난간에 바람 부는 날의 쪽배처럼 나붓나붓 떠 있는 포장마차 머리 위로 취객들이 포장 들추고 나와 철철 쏟아낸 오줌 받아 안은 잔물결처럼 이지러진 낮달이 하나, 박혀 있었다 ―고맙습니다 앞치마에 손 닦으며 나와 돈 받던 주인 아낙이 둥근 허리를 깊이 구부렸다 두 세평, 바람막이 포장 안에 열두 명 시인들이 대낮부터 끼여 앉아 전쟁하듯 마셔댄 생막걸리에, 고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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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 달래에게서 배운 것시(詩)/배창환 2019. 7. 18. 13:47
낯익은 산길 가다 찾는다. 달래, 며칠 전 바로 이 풀섶에 있었는데 찾을 수 없다. 누가 이 길을 지나갔나보다. 잘 보면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뜯겨나간 허리에서 촉을 내어 비이슬에 멱을 감아 더 싱싱하게 새벽 햇살에 얼굴 닦아 더 싱싱하게 주위 풀들이 자라면서 너를 에워 감싸안고 숨겨주고 있다. 이대로 너는, 일년이라 열두 달을 하루도 없이 찬비 바람 뜨거운 해 서늘한 달을 받아들이며 다시 치열하게 한 생을 살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잠들어 있을 새봄에 지각을 흔들어 깨우며 가장 먼저 이 땅 위에 깃발을 들어올릴 것이다. 그러므로 견디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므로 견디는 것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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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 꽃에 대하여시(詩)/배창환 2019. 7. 18. 13:45
열살 때 나는 너를 꺾어 들로 산으로 벌아 벌아 똥쳐라 부르면서 신이 났다. 그때 나는 어린 산적이었다. 내 나이 스물에 꽃밭에서 댕댕 터져오르는 너는 죽도록 슬프고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에 너의 아름다움은 살아 있는 민중의 상징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도 네 속에 살고 싶었다. 마흔 고개 불혹이 되어서도 나는 아직 너를 모른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러면서 흩어지는 까아만 네 씨앗을 보고 있다. 나는 알 수 없다. 쉰이 되고 예순을 넘겨 천지 인간이 제대로 보일 때가 되면 나는 너를 어떻게 사랑하게 될까. 필요 없는 놈은 골라내고 고운 놈만 수북이 옮겨 화분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너를 아껴 사랑하게 될까 아니면 그냥 잡초밭에 두고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