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강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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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시(詩)/강인한 2023. 1. 22. 07:01
사람 사는 일이란 오늘이 어제 같거니, 바람 부는 세상. 저 아래 남녘 바다에 떠서 소금 바람 속에 웃는 듯 조는 듯 소곤거리는 섬들. 시선이 가다 가다 걸음을 쉴 때쯤 백련사를 휘돌아 내려오는 동백나무들 산중턱에 모여 서서 겨울 눈을 생각하며 젖꼭지만한 꽃망울들을 내미는데, 내일이나 모레 만나자는 약속 혹시 그 자리에 내가 없을지 네가 없을지 몰라, 우리가 만나게 될는지. 지푸라기 같은 시간들이 발길을 막을는지도. 아니면 다음 달, 아니면 내년, 아니면 아니면 다음 세상에라도 우리는 만날 수 있겠지. 일찍 핀 동백은 그렇게 흰눈 속에 툭툭 떨어지겠지. 떨어지겠지, 단칼에 베어진 모가지처럼 선혈처럼 떨어지겠지. 천일각에서 담배 한 모금, 생각 한 모금. 사람 사는 일이란 어제도 먼 옛날인 양 가물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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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 숨어 사는 영혼처럼시(詩)/강인한 2020. 8. 10. 18:21
외딴 섬으로 가는 다리였다. 버스는 오 분쯤 달려 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널 때 창밖으로 바다가 아득하였다. 파랗게 보이는 높고 소슬한 하늘, 아래에 어두운 보랏빛, 그 아래 먹구름과 양털구름이 뒤섞이고. 청동의 파도주름과 맑은 햇빛, 색색의 구름들,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사이사이 구름을 뚫고 단숨에 꽂히는 바닥은 은빛 바다였다. 햇빛을 줄기줄기 온몸에 받아 적는 보얀 구름커튼에 잡티 하나. 차창에 묻은 티끌일까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점점 키워보니 아뜩한 하늘에 아, 숨어 사는 영혼처럼 혼자 날고 있는 새였다. (그림 : 이향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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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 빈 손의 기억시(詩)/강인한 2020. 7. 8. 18:11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 안에서 숨 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 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 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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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 자작나무 그 여자시(詩)/강인한 2019. 3. 16. 18:47
자작나무를 사랑했네 비 갠 날 늦은 산책길, 자작나무 그 여자 햇살 비낀 아름다운 숲에서 만났네 구부러진 산책길의 길섶엔 손 내미는 봄꽃들 눈부신 빛깔에 숨이 막혀 어지러워라 자작나무에 기대어 발을 멈췄네 어두워지는 가슴 속 검은 바위틈에 먼 옛날 사라진 불씨가 눈을 뜨는가 차라리 이 숲에서 눈멀어 길을 잃고 싶었네 비 갠 숲 향기에 취하여 이는 오래 전 나에게 마련된 저주인 듯 풀 수 없는 주술에 걸려 치어다보느니 바람결에 점점이 흐르는 연둣빛 사월의 자작나무 이파리들 그 여자 속눈썹을 모르는 척 바람이 스치네 미처 깨닫지 못한 맑고 시원한 울음이 가늘고 여린 가지를 흔드는지 자작나무 이파리 툭툭 찍혀 있는 하늘 가 잊었던 그리움이 내 눈썹 끝에 맺히네 (그림 : 임정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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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 바다의 악보시(詩)/강인한 2018. 7. 4. 15:35
- 벤 구센스의 '바다의 아름다운 노래'에 부쳐 바다가 저만치 물러나자 썰물이 밷어놓은 모래밭에 악보가 드러났다 당신의 입술은 동그랗게 모음을 발음하다가 그만 악보 받침대에 갇혀 나를 바라본다 오, 달콤한 붉은 입술은 적포도주를 담은 글라스 아니 두 장의 장미 꽃잎 같다 하지만 오래전 당신은 이 해변을 떠났다 저만치 과거로부터 떠밀려온 트렁크에는 자물쇠가 채워졌고 두근거리며 들키기 싶은 당신의 사랑이 들어 있을 것이다 두려운 비밀을 향해 걸어가는 내 발자국마다 한 장 두 장 물 젖은 악보가 따라오고 입벌린 소라고둥이 트렁크 위에 앉아 소리친다 이제 곧 태풍이 불어온다고 내 마음 속 잠자는 태풍이 검은 수평선을 끌어낼 것이라고 그리운 당신의 기억을 이 해변에 떠도는 세이렌의 노래로 남겨두고서 나는 이제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