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복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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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흰 고무신에 대한 소고시(詩)/복효근 2021. 11. 29. 12:35
윗집 죽산댁 할머니가 댓돌 위에 눈부시게 닦아놓은 남자 흰 고무신 한 켤레 영감님 쓰러져 신발 한번 신어보지 못한 몇 년 동안도 가신 지 몇 년이 지난 오늘도 늘 그 자리 바람이 신어보는 신발 가끔 눈발이나 신어보는 그것에 무슨 먼지와 흙이 얼마나 묻었다고 마루를 내려서기도 힘든 노구를 움직여 없는 남편 신발을 닦아 당신 신발 곁에 놓으시네 저 신발 신고 꿈결에 오셨을라나 후생의 먼길을 걷고 계실라나 주인 없는 신발을 닦는, 신을 일 없는 신발을 놓아두는 저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 바위 석가탑을 세우는 일을 알 수 있으리 작은 배 같은 신발 한 켤레로 이생과 후생이 이웃 같은 시간이 이렇게 있네 (그림 : 정인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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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채송화 피는 날에시(詩)/복효근 2021. 9. 4. 13:24
마당에 풀을 뽑을 때 어쩌다 심지도 않은 채송화 어린 싹을 보면 무성하게 피어서 꽃 피울 기약을 믿진 않아도 차마 뽑지도 못하던 날이 있어 물 주거나 발길에 밟히지 말라고 표식을 해두거나 하지도 않으면서 차마 뽑지는 못하고 어쩌다 그것이 정말 꽃이라도 피울 양이면 못내 미안코 대견하고 눈물겨워서 세상을 보살피는 그 무엇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 세상 너머 눈물 너머 죽움 너머 그 어떤 크나큰 손길이 나를 어쩌다 그의 마당에 찾아온 꽃씨처럼 여기고 차마 뽑지 못하고 비 내리고 바람 불어 주는 듯이도 생각되어서 마당을 걷는데도 길이 사뭇 조심스러워지는 날이 있기도 하다. (그림 : 김한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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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보리를 찾아서시(詩)/복효근 2021. 6. 8. 13:51
남해금산의 보리암은 바다새의 둥지처럼 절벽에 매달려 있었네 그 바위 절벽이 아름답다고 바라다뵈는 바다가 그림 같다고 말하지 말라 바랑에 쌀을 짊어지고 아둥바둥 오르는 쭈그렁 보살님네들이 더 아름다운 곳 길 아닌 길만 더듬어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는 벼랑 끝 혹은, 뛰어내릴 수 있는 바다 언제나 끝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나그네에게 끝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보리암은 절벽에 있었네 바닷새는 벼랑에 살고 있었네 남해금산은 가만히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 하나를 풀어주고 있네 (그림 : 박희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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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버팀목에 대하여시(詩)/복효근 2020. 11. 9. 14:12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틔우고 꽃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림 : 하삼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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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가을 잎사귀시(詩)/복효근 2020. 10. 26. 20:53
귀, 잎사귀라 했거니 봄 새벽부터 가을 늦은 저녁까지를 선 채로 귀를 열고 들어왔나니 비바람에 귀싸대기 얻어터져가며 세상의 소리 소문 다 들어왔나니 그리하여 저귀는 바야흐로 제 몸을 심지 삼아 불 밝힌 관음(觀音)의 귀는 아닐까 이 가을날 물 드는 나무 아래 서면 발자국소리 하나 관절꺾는 소리 하나도 조신하여라 하나도 둘도 몇 십도 몇 백도 아닌 저 수천수만의 귀들이 경청하는 이 지상의 한때 그러니 가을 나무 아래서는 아직도 상기 핏빛으로 남은 그리움이랑 발설하지도 만한 채 깊이 묻은 억울한 옛사랑이랑 죄다 일러 바쳐도 좋겠다 이윽고 다 듣고는 한잎한잎 제 귀를 내려놓는 나무 아래서 끝끝내 말하지 못한 심중의 한 마디까지 다 들켜놓고는 이제 나도 말로써 하는 지상의 언어를 다 여의고 묵묵하게 또 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