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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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편지시(詩)/강연호 2020. 12. 11. 11:53
나의 겨울에도 그대는 늘 피어 있습니다 어디선가 한 올씩 실타래 푸는 소리 들려와 내다보니 조무래기 눈발 날리더군요 얼른 생각하기에는 처마 밑에서 떨고 있을 겨울새는 어떻게 몸 녹일까 궁금해졌지만 마음 시리면 잔걱정 늘게 마련이지요 하다못해 저 눈발도 마른 자리 골라 쌓이는데 그러고 보니 월동준비 튼튼하다고 해서 겨울살이 따뜻한 게 아니더군요 해 바뀌면 산에 들에 다시 꽃피는 거야 오랜 습관 바꿀 줄 모르는 자연법인데 그래도 무슨 꽃불 지필 일 있다고 노상 새 봄이 오면, 새 봄이 오면 기다림을 노래하는 사람들만 따뜻해 보였어요 생각 덮으러 끌어당기는 이불 적막한 나의 겨울에도 그대는 늘 피어 있습니다 기다려봐야 내가 피워낼 꽃은 천지사방 없는 봄인데, 그대는 여태 먼데 채 지나지 않은 세밑 달력이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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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단풍시(詩)/강연호 2020. 10. 29. 18:20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어서 붉은 잎 단풍 한 장이 가슴을 치네 그때 눈멀고 귀먹어 생각해보면 가슴이 제일 다치기 쉬운 곳이었지만 그래서 감추기 쉬운 곳이기도 했네 차마 할 말이 있기는 있어 언젠가 가장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으나 그 혀에 아무 고백도 올려놓지 못했네 다시 보면 붉은 손가락인 듯 서늘한 빗질을 전한 적도 있으나 그 손바닥에 아무 약속도 적어주지 않았네 붉은 혀 붉은 손마다 뜨겁게 덴 자국이 있네 남몰래 다친 가슴에 쪼글쪼글 무말랭이 같은 서리가 앉네 감추면 결국 혼자 견뎌야 하는 법이지만 사랑은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어서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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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시(詩)/강연호 2020. 2. 25. 10:44
솥뚜껑 위의 삼겹살이 지글거린다고 해서 생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찍 취한 사람들은 여전히 호기롭다 그들도 박박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남루나 불우를 그저 견디겠다는 듯 반쯤 남은 술잔은 건너편의 한가로운 젓가락질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 이제 출렁거리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 참다 참다 그예 저질러버린 생이 있다는 듯 창밖으로 지그시 내리는 빗줄기 빨래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고 쌀알을 펼쳐본들 점괘는 눅눅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마 이 밤이 지나가면 냉장고의 찬물을 벌컥벌컥 들어켜야 할 새벽이 온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어쩌면 이 술잔은 여기 이 생에 건네질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삼겹살을 뒤집어봐야 달라질 것 없고 희망은 늘 실날같지만 오늘의 운세는 언제나 재기발랄 명쾌하다 62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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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국물시(詩)/강연호 2020. 2. 25. 10:42
새벽 해장국집에서 혼자 국물 맛을 보다가 돌연 사무치는 , 너 이제 국물도 없다, 는 말 영문도 모른 채 너는 우선 도리질부터 하겠지만 아니다 아니다 이런 게 아니다 하면서도 용케도 아닌 것만 골라 디뎠구나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란 이런 때 참 주책도 없지 너는 결국 너와의 불화를 접고 너 자신을 타이르려 할지 모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도 두드려주며 다 잘 될거야, 무턱대고 낙관적일 수도 있다 그렇게 국물 앞에서 해찰하는 너를 누군가 지켜보기라도 한다면 물론 혀를 찰거다, 저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걸 보면 그러거나 말거나 국물도 없는 나이의 투정답게 어쩌면 너는 요즘 흉을 보기도 하겠지 늬들이 국물 맛을 알아? 국물 맛이란 사실 국물도 없을 때쯤 되어야 아는 맛 아닌가, 바로 이 맛이야 그때쯤 꾸역꾸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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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이름의 기원시(詩)/강연호 2020. 2. 25. 10:40
뒤에서 누가 이름을 부른다 무심코 돌아보지만 나를 부른 게 맞나 아무리 불러 세워도 이름은 이름 부르는 순간 이미 과거의 형식 후회가 덕지덕지 앉은 박박 지우고 새로 고쳐 쓰고 싶은 과거는 흘러갔다, 과거는 흘러가서 아는 이름인 줄 알았어요 아는 이름이 없네요 이름의 과거는 곰곰 쌓이지 과거의 다른 이름은 곡절이지, 이름이 이름을 변명하지만 꾹꾹 눌러쓰는 연필심보다 이름이 먼저 부러질 것 같은 이름을 불러 만나고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 것 이름의 곡절은 깊기도 하지 이름은 이름 부르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 이름은 이름을 걸어 배반의 덫을 피할 수 없는 기원으로 삼지 (그림 : 이형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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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영원의 그늘시(詩)/강연호 2020. 2. 25. 10:38
오후의 그늘 아래 당신이 앉고 당신의 그늘에 기대 나는 누웠지 물 고인 돌확에 부레옥잠 떠다니듯 그늘에 그늘이 깊어 잠들기 좋았으나 그보다는 나는 영원, 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는데 자리 바꿔 앉기 놀이나 하자는 듯 그늘은 심심해서 시샘해서 조금씩 자리를 바꿔 앉네 나뭇잎 한 장이 눈을 가리고 바람인지 햇살인지 영원이란, 영원히 순간이지 술래마냥 속삭이네 오후의 그늘은 문득 늙고 당신의 그늘은 자취가 없네 물 고인 돌확에 부레옥잠 떠다니듯 나는 일어나 빙빙 도네 누울 자리가 없네 앉을 자리조차 없네 (그림 : 장정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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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12월시(詩)/강연호 2018. 12. 6. 00:07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 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 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풍설(風雪)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지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빛깔에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구한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박듯이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그림 : 김종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