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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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나도 왕년에는시(詩)/강연호 2018. 7. 16. 16:36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엔 사내들 몇이서 밥 대신 소주 들이켜며 저마다의 왕년을 안주 삼고 있었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소주에 밥 말아먹던 시절 있었나요 사내들의 뒷덜미를 움켜진 그림자 흔들리고 불빛에 배인 눈시울은 붉다 못해 황량했습니다 쓰디쓴 왕년을 입 안에 털어넣으며 사내들은 헐거운 삶을 더욱 풀어놓았구요 내 늦은 저녁도 소주처럼 쓰고 차가웠습니다 쓰디쓴 밥알들을 입 안에 털어넣고 왕년인 듯 오래오래 씹고 또 씹었습니다 덧난 눈시울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림 : 조희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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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시(詩)/강연호 2018. 4. 12. 19:40
지리산 산동 마을로 산수유 사러 갔습니다 산동 마을은 바로 산수유 마을이고 그 열매로 차를 끓여 마시면 이명에 좋다던가요 어디서 흘려들은 처방을 핑계 삼았습니다만 사실은 가을빛이 이명처럼 넌출거렸기 때문입니다 이명이란, 미궁 같은 귓바퀴가 소리의 출구를 봉해버린 것이지요 내뱉지 못한 소리들이 한꺼번에 귀로 몰려 일제히 소용돌이치는 것이지요,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면서 이 소리와 저 소리가 한데 뒤섞이는 것이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이명은 이명이고 산수유는 산수유겠지만 옛날에는 마을의 처녀들이 산수유 열매를 입에 넣어 하나하나 씨앗을 발라냈다던가요 산수유, 하고 입안에서 가만가만 소리를 궁글려보면 이명이란 또한 오래전 미처 못다 한 고백 같은 것이어서 이제라도 산수유 씨앗처럼 간곡하게 뱉어낼 것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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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여반장시(詩)/강연호 2018. 3. 17. 09:11
지하보도 바닥에서 손바닥을 만난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내민 바닥에 등을 맞댄 손바닥을 만난다 지하보도 바닥에 엎드리는 일쯤이야 손바닥을 내미는 일쯤이야 가끔 떨어지는 동전이나 지폐의 액면을 감촉만으로 알아맞히는 일쯤이야 어쩌면 어려운 건 바닥에 저당 잡힌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일 손바닥에 새겨진 손금의 길을 처음부터 다시, 처음부터 다시 거듭 되짚어가는 일 그보다 정작 어려운 건 손바닥을 뒤집는 일 뒤집어 봐야 바닥에 바닥을 맞대는 일 하지만 바닥이 바닥을 짚어야 떨쳐 일어날 수 있는 일 일어나 텅 빈 허공이라도 불끈 움켜쥐어야 하는 일 여반장(如反掌) : 쉽기가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다. 일이 매우 쉬운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림 : 최석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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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제기동 블루스 1시(詩)/강연호 2017. 12. 27. 22:03
이깐 어둠쯤이야 돌멩이 몇 개로 후익 갈라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막한 날들이 제기천 썩은 물처럼 고일 때마다 내가 야심껏 던져 넣은 돌멩이들은 지금 어느 만큼의 동그라미를 물결 속에 키웠는지 헛된 헤아림 헛된 취기 못 이겨 걸음마다 물음표를 찍곤 하던 귀가길 자취방 문을 열면 저도 역시 혼자라고 툴툴거리다가 지친 식빵 조각이 흩어진 머리칼과 함께 씹히곤 하였다 제기동, 한 집 건너 두 집 건너 하숙과 자취에 익숙했던 한양 유학 동기생들은 이미 모두 떠났지만 도무지 건방졌던 수업시대 못난 반성 때문인지 졸업 후에도 나는 마냥 죽치고 있었다 비듬 같은 페퍼포그와 도서관 늦은 불빛도 그리워하다 보면 이깐 어둠쯤이야 싶었던 객기보다 시대의 아픔이란 게 다만 지리멸렬했다 그런 그런 자책과 앨범뿐인 이삿짐을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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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물웅덩이시(詩)/강연호 2017. 2. 10. 10:47
바닷가 모래밭에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풍경이 참 골똘해서 멀찌감치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물웅덩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 가장자리 한쪽을 허물어뜨렸습니다 모래알들이 스르르 물웅덩이 속으로 꺼져들었습니다 땅이 꺼지는 한숨이란 저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또 한참 지나 물웅덩이는 제 다른 한쪽을 고요한 연기처럼 다시 허물어뜨렸습니다 물웅덩이는 그게 저 자신을 넓히는 줄 알지만 그래서 마침내 먼 바다 어디론가 흘러가고도 싶겠지만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모래알들에 제 골똘한 깊이가 메워지는 것도 아는 걸까요 그대 향한 마음이 나에게도 바닷가 모래밭의 물웅덩이처럼 고여 있습니다 나도 땅이 꺼지는 한숨으로 내 가장자리 한쪽을 허물어 그대를 넘보고 싶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대를 향한 마음이 스스로를 깎아 참으로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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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섬시(詩)/강연호 2016. 8. 19. 01:04
한 사나흘만 묵어가고 싶었다 더 이상은 곤란해 아름다움이 외로움으로 바뀌기 전에 뭍으로 나가야 해 그런 굴 딱지 달라붙은 다짐들을 먼저 바다로 띄어 보내며 까닭없이 아득해지고 싶었다 그러면 어느 이름 모를 몇 장의 바다를 걷어낸 뒤 또 다른 곳에서 한 사나흘 묵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안개에 곱게 머리 헹궈낸 바람결 따라 뿌우우 뱃고동 순한 물길 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떠돌수록 말없는 사내되어 제 그림자 스스로 밟을 무렵이면 애쓰지 않아도 잔잔하게 밀려 비로소 뭍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림 : 채기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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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시(詩)/강연호 2016. 7. 26. 12:00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엄마를 기다리다 허기마저 지친 오후 방죽 너머 긴 머리채를 푸는 산그늘이 서러워질 때 언젠가 무작정 상경하고 싶었지만 갈 곳 몰라 이름 모를 역광장에 입간판처럼 서 있을 때 어느새 조약돌만큼 자란 목젖이 싫어 겨울 다가도록 목도리를 풀지 않고 상심할 때 쉽게 다치는 내성의 한 시절을 조용히 흔들며 가만가만 가지마다 둥지를 트는 속삭임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내가 실연의 강가에서 하염없이 출렁거리는 작은 배 한 척으로 남아 쓸쓸해질 때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은 도무지 누군가 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줄 모른다며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시한다며 야속해질 때 그래, 비밀 같은 바람소리였네 숨 죽여 들을수록 낮아져 하마 끊길 듯 이어지는 다독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