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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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무꽃시(詩)/배한봉 2022. 3. 30. 14:30
무꽃이 흔들리고 있다. 물살이 한 물살을 밀고. 또 한 물살이 한 물살을 밀어 강물이 나아가듯 흰 나비가 흔들림의 결을 만들고 있다. 묵은 땅에 일군 자그마한 무밭의 아침, 버드나무 몇 그루가 흰 나비 날개 끝에서 번지는 공중의 떨림을 조용조용 보고 있 다. 나도 한참 보고 있다. 바람 불지 않는데 흔들리는 것, 마음이 떨리는 것, 성스러운 시간이 움직이는 것, 나의 외진 마음이 한 물살을 밀고, 그 물살이 또 한 물살을 밀어 너에게 가 닿는 것. 그렇게 너와 나는 연결돼 있다. 하나가 돼 있다. 넓고 아득한 하늘 외진 곳에 태어난 빛이 무꽃에 와 닿듯, 무꽃 옆에서 흰 나비가, 넓고 아득한 공중의 외진 데까지 무꽃의 흰빛을 밀어 밀어서 가 닿게 하듯, (그림 : 노숙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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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통영의 봄은 맛있다시(詩)/배한봉 2022. 3. 9. 12:15
참 달다 이 봄맛, 앓던 젖몸살 풀듯 곤곤한 냄새 배인, 통영 여객선터미널 앞 서호시장 식당 골목, 다닥다닥 붙은 상점들 사이, 우리처럼 알음알음 찾아온 객이, 열 개 남짓한 식탁을 다 차지한, 자그마한 밥집 분소식당에서 뜨거운 김 솟는, 국물 이 끝내준다는 도다리쑥국을 먹는다 나눌 분 자 웃음 소 자, 웃음 나눠준다는 이 집 옥호가 도다리쑥국 맛만큼이나 시원하 다고 웃음 짓는 문재 형 앞 빈자리에 젊은 부부 한 쌍이 앉는 다 자리 생길 때마다 누구나 스스럼없이 동석하는 분소식당 풍경이 쌀뜨물에 된장 풀어넣는 국물 맛 같다 탕탕 잘라넣은 도다리가, 살큼 익은 쑥의 향을 따라 혀끝에서 녹는 통영의 봄맛, 생기로 차오르는, 연꽃처럼 떠 있는 통영 앞바 다 섬들이 신열에 달뜬 몸을 풀며 바다 틈새 어딘가 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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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이 시대의 변죽시(詩)/배한봉 2021. 7. 7. 12:07
변죽을 아시는지요 그릇 따위의 가장자리, 사람으로 치면 저 변방의 농군이나 서생들 변죽 울리지 마라고 걸핏하면 무시하던 그 변죽을 이제 울려야겠군요 변죽 있으므로 복판도 있다는 걸 당신에게 알려줘야겠군요 그 중심도 실은 그릇의 일부 변죽 없는 그릇은 이미 그릇은 아니지요 당신, 아시는지요 당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변죽,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하는 변죽,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변죽, 삼거웃 없는 마음을 중심에 두고 싶은 변죽을 쳐도 울지 않는 복판을 가진 이 시대의 슬프고도 아픈 변죽을 (그림 : 장정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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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봄의 속도시(詩)/배한봉 2020. 3. 24. 15:39
봄은 어떤 속도로 오느냐는 아이의 물음에 과학자는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라 말하더군. 며칠 내내 부풀기만 하던 분홍빛 꽃봉오리가 한꺼번에, 온통 눈부시게 터져 미세먼지 뒤덮였던 하늘이 드맑게 눈을 뜨는 아침. 이걸 보았다면 과학자는 그 꽃나무 옆 시냇물이 구름을 타고 여행 갔다 돌아와 하늘의 금모래 같기도 뱀 비늘 같기도 한 별 이야기를 꽃망울들에 들려주는 속도라 말하지 않았을까. 사람에게 스며든 꽃향기가 사람의 숨결로 어디 까마득한 데 여행가는 때 먼 옛날 나였던 꽃나무가 지금은 사람이 되었다고, 꽃나무가 사람이 되는 속도로 봄은 온다고 들려주면 아이는 시시한 마법이라고 순 거짓말쟁이라고 나를 놀려대겠지. 그러나 먼 훗날의 아이가 나무 안에서 분홍빛 꽃눈으로 자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면 봄의 속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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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시(詩)/배한봉 2019. 10. 24. 11:15
옥상에 상자 텃밭을 만들었다. 밑거름을 넣고 상추며 들깨 모종을 사다 심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물을 준 것 뿐인데 어느새 잎이 손바닥 만해졌다. 한 잎씩 채소를 거둬들이는데 푸릇푸릇 콧노래가 실실 새나왔다. 부자가 이런 것이라면, 삿된 생각 한 점 들지 않고 그저 옥상에 둥둥 떠다니는 실없는 웃음을 데려와 웃거름으로 얹어주는 것이 행복이라는 재산을 불리는 일이라면 나는 엉뚱한 곳을 오래 기웃거린 것이다. 아하, 웃음이라는 배의 조그마한 항구 금은보화 싣고 출렁이는 볼록한 종이가방에서 푸른빛 환하게 흘러나오는 시간과 싱긋싱긋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내 이마에 걸리는 초여름 건들바람이 수확한 상추, 깻잎 쌈밥만큼 달달했다. (그림 : 방정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