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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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11월의 기린에게시(詩)/손택수 2022. 11. 3. 15:43
옥탑방의 철제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리고 있는지, 어쭙니다 당신은 그 계단이 모딜리아니의 여인 목덜미를 닮았다고 하였지요 그 수척하고 해쓱한 목 끝의 옥탑방은 남하하는 철새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 날개를 쉬어갈 수 있도록 일찌감치 불을 끈다고 하였습니다 싸우기 싫어서 산으로 간 고산족의 후예였을까요 어느 가을은 가지를 다 쳐버린 플라타너스에게 초원의 기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혹만 남은 가지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일어난 수피가 얼룩을 닮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어요 저는 기린이 울 줄을 모른다고 하였지만 우리에겐 저마다 다른 울음의 형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사이 저는 위장이 늘어나서 갈수록 목도 점점 굵어져 갑니다 반성도 중독성이 되어덕지덕지 살이 오르고 있습니다 포도의 낙엽들은 이미 마댓자루 속으로 들어갈 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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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있는 그대로, 라는 말시(詩)/손택수 2022. 10. 12. 12:39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그림 : 손미량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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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밥물 눈금시(詩)/손택수 2022. 1. 23. 14:03
일인 가족 밥물 눈금을 찾지 못해 질거나 된밥을 먹는 일이 잦더니 이제는 그도 좀 익숙해져서 손마디나 손등, 손가락 주름을 눈금으로 쓸 줄도 알게 되었다 촘촘한 손등 주름 따라 밥맛을 조금씩 달리해본다 손등 중앙까지 올라온 수위를 중지의 마디를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물꼬를 트기도 하고 막기도 하면서 논에 물을 보러 가던 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저녁때가 되면 한 끼라도 아껴보자 친구 집에 마실을 가던 소년의 저녁도 떠오른다 한 그릇으로 두 그릇 세 그릇이 되어라 밥국을 끓이던 문현동 가난한 지붕들이 내 손가락 마디에는 있다 일찍 철이 들어서 슬픈 귓속으로 봉지쌀 탈탈 터는 소리라도 들려올 듯, 얼굴보다 먼저 늙은 손이긴 해도 전기밥솥에는 없는 눈금을 내 손은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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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석류시(詩)/손택수 2021. 9. 14. 12:34
석류가 붉은 건 다 설명할 수 없다 석류는 천연 에스트로겐만도 아니고 여름의 소나기와 천둥과 뙤약볕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당신에게 내가 이끌리는 이유처럼, 이유를 몰라도 좋은 이유처럼 그걸 그늘이라 부른다면 석류는 그늘로 살찐 과육이다 물론 그 또한 나의 해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적어도 석류를 사랑으로 외롭게 하지는 않겠다는 뜻 해마다 석류가 붉는 것은, 석류 앞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석류의 비밀을 너와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풀고 풀어도 풀 수 없는 비밀을 함께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석류는 그저 석류이다 석류로서 투명하고 석류로서 충만할 뿐이다 침이 고이는 것들은 대체로 그렇질 않던가 (그림 : 전명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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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시(詩)/손택수 2021. 9. 6. 11:54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였다 종로에서 약속이 있을 때면 가끔식 들르던 구두 수선집 가게 귀퉁이에 기타가 있었다 몇 년을 들러도 낯가림이 많은 주인처럼 쑥스럽다는 듯이 돌아서서 늘 등만 내밀고 있는 기타 소리를 낼 줄은 아는가 싶어서 한번은 넌지시 곡을 청했다 혼자서 연습한 거라 연주라고 할 수 없어요 거듭된 단골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무슨 의식을 치르듯 찬찬히 기타를 품에 안던 사내 애인을 안을 때가 저럴까 가슴팍에 끌어안은 기타는 사내처럼 허름하고 함부로 묻은 구두약에 줄마저 녹슬었는데 알람브라, 물소리가 검은 손톱 사이에서 뿜어져나오고 사라진 왕국의 꿈이 이베리아반도의 마른 수로를 적시며 흘러가고 구두코에 빛나는 광처럼 사내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었다 사나운 버스 소리도 곡에 맞춰 유순해진 잠시, 종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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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의자 위에 두고 온 볕시(詩)/손택수 2021. 7. 26. 21:34
호수공원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자니 누가 옆에 와서 앉는다 나의 영토를 침범당했다는 느낌, 의자를 전세 낸 처지도 아닌데 그럼 쓰나, 불쾌함이 전달되지 않도록 휴대폰을 보는 척 슬그머니 일어선다 내가 모이를 쪼는 비둘기에게 가까이 갔을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이었겠다 오수를 즐기는 길고양이를 쓰다듬으려 다가갔을 때 당혹스러워하던 고양이의 눈동자도 이해할 만하다 그런 장소들이 있다 그의 몸과 분리할 수 없어서 거기에 있는 볕과 바람과 나무들과 흔들리는 그림자마저 그의 몸만 같아서 부러 이만치 거리를 두고 호젓하게 있게 하고 싶은 곳들 떠나온 자리가 두고 온 몸 같아 멀찌감치서 돌아다본다 의자 위에 두고 온 볕이 앉아 있다 (그림 : 노태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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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있는 그대로, 라는 말시(詩)/손택수 2021. 7. 18. 14:23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그림 : 김대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