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류가 붉은 건 다 설명할 수 없다
석류는 천연 에스트로겐만도 아니고
여름의 소나기와 천둥과 뙤약볕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당신에게 내가 이끌리는 이유처럼,
이유를 몰라도 좋은 이유처럼
그걸 그늘이라 부른다면 석류는 그늘로 살찐 과육이다
물론 그 또한 나의 해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적어도 석류를 사랑으로 외롭게 하지는 않겠다는 뜻
해마다 석류가 붉는 것은, 석류 앞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석류의 비밀을 너와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풀고 풀어도 풀 수 없는 비밀을 함께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석류는 그저 석류이다
석류로서 투명하고 석류로서 충만할 뿐이다
침이 고이는 것들은 대체로
그렇질 않던가
(그림 : 전명덕 화백)
'시(詩) > 손택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택수 - 술의 오래된 미래 (0) 2022.09.14 손택수 - 밥물 눈금 (0) 2022.01.23 손택수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0) 2021.09.06 손택수 - 의자 위에 두고 온 볕 (0) 2021.07.26 손택수 - 있는 그대로, 라는 말 (0) 202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