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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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밤눈시(詩)/오탁번 2023. 1. 16. 18:04
박달재 밑 외진 마을 홀로 사는 할머니가 밤저녁에 오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네 물레로 잣는 무명실인 듯 하염없이 내리는 밤눈 소리 듣다가 사람 발소리인가 하고 밖을 내다보다 간두네 한밤중에도 잠 못 든 할머니가 쏟아지는 밤눈을 보는데 눈송이 송이 사이로 언뜻 언뜻 지난 세월 떠오르네 길쌈하다 젖이 불어 종종걸음 달려가는 어미와 배냇짓하는 아기도 눈빛으로 보이네 밤눈이 할머니의 빛바랜 자서전인 양 책 묶은 노끈도 다 풀어진 기승전결 아련한 지난 이야기 밤 내내 조곤조곤 속삭이네 섣달그믐 한밤중 할머니의 눈과 귀 점점 밝아지네 (그림 : 김영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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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해피 버스데이시(詩)/오탁번 2020. 4. 30. 18:38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Happy Birthday Variations, for orchestra Kremerata Baltica Gidon Kremer (Violin) Variation Nach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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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밥냄새 1시(詩)/오탁번 2019. 9. 19. 15:59
하루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ㅡ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ㅡ밥 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밥소라 : 밥이나 떡, 국수 따위의 음식을 담는 큰 놋그릇 (그림 : 김우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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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눈 내리는 마을시(詩)/오탁번 2017. 12. 17. 14:03
건너 마을 다듬이 소리가 눈발 사이로 다듬다듬 들려오면 보리밭의 보리는 봄을 꿈꾸고 시렁 위의 씨옥수수도 새앙쥐 같은 아이들도 잠이 든다 꿈나라의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밤마실 나온 호랑이가 달디단 곶감이 겁이 나서 어흥어흥 헛기침을 하면 눈 사람의 한쪽 수염이 툭 떨어져 숯이 된다 밤새 내린 눈에 고샅길이 막히면 은하수 물빛 어린 까치들이 아침 소식을 전해 주고 다음 빙하기가 만년이나 남은 눈 내리는 마을의 하양 지붕이 먼 은하수까지 비친다 (그림 : 안모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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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첫사랑시(詩)/오탁번 2017. 5. 2. 14:34
천둥산 박달재 사이 낮에도 부엉새가 우는 깊은 산골 사립문 옆 향나무에서는 향 냄새가 늘 독하게 퍼졌다 우리 집 오래뜰에서 굴뚝새빛 단발머리 주근깨 오소소한 소녀와 까까머리 코흘리개 소년은 퍼져나는 향 냄새에 취해 영겁까지 약속하는 토끼풀 반지를 끼고 영원히 현재진행형인 줄 알았던 그 옛날의 사랑이 이제는 과거완료가 된 지워진 행간 속에서 그대 찾아가는 쪽배를 타고 흐트러진 낱말 하나하나 수틀에 수놓듯 팽팽하게 당기면서 거친 은하수 물결을 노 저어갈까 한다 -너를 사랑한다 이 한마디 말 오작교 난간에 걸어둘까 한다 (그림 : 신창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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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그렇지, 뭐시(詩)/오탁번 2016. 7. 26. 21:19
'어떻게 지내니?' 물으면 '그렇지, 뭐' 할 뿐 더 이상 말이 없다 이 말만 듣고는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다 허나 우리 동네에서는 이 말만 듣고도 엊저녁 밤농사가 신통했는지 안 했는지 고추농사 재미봤는지 비료 값 농약 값 빼고 나면 말짱 헛농사 지었는지 훤하게 안다 눈빛과 말품을 보고 안다 진짜 뜻은 애당초 말이나 글로는 다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장에 가서 농산물 팔고 오는 이에게 오늘 어땠느냐고 물어도 '그렇지, 뭐' 이 한 마디뿐 더 이상 대꾸가 없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는 다 안다 헐값에 팔았는지 유기농이라고 허풍 떨어서 바가지 씌웠는지 갈쌍갈쌍한 눈빛을 보면 다 안다 몇 년 전 외아들이 선산까지 다 팔아먹고 도망간 정미소 집 늙은 홀아비는 동네사람들이 위로하면 기러기 날아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