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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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메롱메롱시(詩)/오탁번 2015. 8. 15. 22:03
팟종에서 파씨가 까맣게 떨어지자 깨알 쏟아지는 줄 알고 종종종 달려가는 노랑 병아리가 참말 우습지? 쇠파리 쫓는 어미소 꼬리에 놀라 냅다 뛰는 젖 뗄 때 된 송아지처럼 내 유년의 꿈이 내달리던 들녘은 옥수수수염처럼 볼을 간질이며 메롱메롱 자꾸만 속삭인다 장수잠자리 한 마리 잡아서 호박꽃 꽃가루 묻혀 날리면 제 짝인 줄 알고 날아와 잡히는 수컷 장수잠자리도 용용 쌤통이지? 내 유년의 꿈을 실은 장수잠자리가 투명한 헬리콥터 타고 커다란 겹눈 반짝이며 꿈결 속 하늘로 날아온다 호적등본에나 남아있는 줄 알았던 추억의 비행장에서는 까망 파씨와 종종종 병아리와 금빛 송아지와 별별 장수잠자리가 날마다 꿈마다 뜨고 내린다 밤송이머리에 중학생 모자 쓰고 떠나온 고향 길섶에 심심하게 피어있는 민들레도 홀씨 하얗게 하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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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아이들의 화실시(詩)/오탁번 2015. 5. 21. 11:06
아이들의 손에서 태어나는 썰매 타는 여름과 꽃 피는 겨울 십자가 위에 앉은 까마귀가 몽당 크레용을 뒤집어 쓰고 비둘기 흉내를 내며 웃는다 꽃병 위에 뜬 아침해는 앞니 빠진 아이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구름 사이로 솟은 미끄럼틀이 날개를 파닥거린다 아침에 자른 생일과자의 촛불은 어른들의 근심으로 곱게 타오르고 오후의 그림교실에서는 마차를 타고 가는 왕자님이 벽시계에 부딪혀 곤두박질한다 시계바늘이 깜짝 놀라 묵찌빠 묵찌빠 가위바위보를 하고 하늘은 온통 화재가 났다 소방수 아저씨의 날개에도 빨주노초파남보 불이 붙었다 어른들의 근심은 물방울 같은 별이 되어 참 잘 했어요 별도장을 찍는다 (그림 : 김흥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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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큰스님시(詩)/오탁번 2015. 5. 21. 01:12
이승을 떠나는 그대의 누더기 옷자락 사이로 해인사 가을바람 한 줄기 낙엽처럼 빠져나가고 참나무 연기 뼈와 살을 태우며 계곡을 맴돈다 어느 고요한 날 저녁 무렵 둠벙에서 연꽃 피어나듯 오동나무 높은 가지에서 오동잎 하나 뚝 떨어지듯 무심히 돌아왔다가 훌쩍 떠나버리는 그대여 대웅전 앞 석등에 불이 켜질 때마다 목탁 도끼로 패어 불바다 만들려고 안했나 내가 죽어 참나무 장작 위에 자빠졌다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건 아니지? 석가는 큰 도적이고 달마는 작은 도적이니 나는 도적놈들 밑씻개나 만드는 땡추여 29는 18이요 씨팔은 두 아가리가 맞붙어야지? 두견새 우는 골에 흩어지는 붉은 꽃이여 저승문 앞에 선 그대의 검정고무신 사이로 해인사 가을낙엽 한 줄기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녹두알 좁쌀만한 똥고집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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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겨울비시(詩)/오탁번 2015. 5. 21. 00:56
눈이 펑펑 쏟아져야 할 텐데 비가 온다 소한 대한 추위에 불알까지 꽁꽁 얼어야 할 텐데 비가 온다 겨드랑이에서 게을러 터진 땀냄새 나고 지난해 저질렀던 온갖 부끄러움도 다 젖는다 흰 눈 내려서 이 세상 어둠 모두 뒤덮어서 쑥덤불 같은 내 마음도 흰 도화지처럼 되어야지 순백의 마음 엮어서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수 있다 한겨울 깊은 저녁인데 비가 내린다 슬픈 사람 슬픈 사람끼리 눈을 맞으며 저 멀리 원시림이 매몰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눈을 밟으며 귀가 맑게 틔였던 지나가버린 아침을 겨울비 맞으면서 찾을 수가 없는 슬픔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 그때 그 이름 저녁해 빛날 때마다 그토록 숱하던 그리움도 이제는 철 지난 겨울비로 흉칙하게 흩어진다 눈 맞으며 달려가고 싶은 그 옛날의 사랑이여 비가 온다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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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겨울강시(詩)/오탁번 2015. 5. 21. 00:51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그림 : 이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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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감자밭시(詩)/오탁번 2014. 12. 21. 18:39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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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그 옛날의 사랑시(詩)/오탁번 2014. 11. 29. 16:10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하늘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羽化되어 하늘을 날으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빨간 털실과 오디빛 참빗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 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가을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