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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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환 - 꽃끼리 붐비다시(詩)/오탁번 2014. 9. 5. 09:50
―원서헌 뜨락에서 5월을 앞뒤해서 원서헌 뜨락은, 샛바람 난간에 거문고처럼 기댄 옥매부터 금입사한 애기 손톱, 물기슭의 어리연까지, 그래봤자 풋내나 풍기는 것들로 샅샅이 북새통이다 거기다가 청개구리 물두꺼비 소리나, 곤줄박이에다 비비새 딱따구리 등속의 새소리라도 곁들이면 손을 쓸 지경이 아니다 잇바디를 간조롱히 드러내고 시치미떼는 금낭화는 또 그렇다 치고, 부싯돌 불찌처럼 떼로 엎질러지는 수수꽃다리도 가관이다 울섶에 노박이로 선 조팝나무는 살강 가득 고봉밥에 식은밥 선밥 대궁밥까지 하냥 매나니로 쟁여 놓았다 희끗희끗 갓털 타고 뛰어오르는 서양민들레 홀씨는, 민물게 幼生과 김지이지로 어슷비슷한데, 함초롬한 어귀 별꽃 두어 송이는 하릴없이 아궁이 속 불잉걸만 뒤적거린다 채홍사 치고는 입성이 두메발톱만한 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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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여기쯤에서시(詩)/오탁번 2014. 2. 10. 16:40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오고 내 몸에 묻어 있는 눈썹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너의 안경이 흐려진다 해도 말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비비며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림 : 김경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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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시(詩)/오탁번 2013. 12. 26. 13:52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무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 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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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눈부처시(詩)/오탁번 2013. 12. 26. 13:48
정월 대보름날 윷놀이 하다가 눈깜짝이 한 씨가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그만 쓰러졌다 사람들이 놀라 일으키자 ㅡㅡ뭐여? 왜들 이려? 한마디 하고는 다시 쓰러졌다 동 트자마자 일어나 개 혓바닥같이 생긴 괭이를 들고 논꼬 보러 가던 동네에서 제일 바지런한 조쌀한 한 씨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한 씨 삼우제 날 동네사람들이 모여 경로당에서 소주를 마셨다 가뭇가뭇한 한 씨 얼굴이 술잔 속에 눈부처인 양 언뜻 비쳤다 이승 저승이 입술에 닿는 술잔만큼 너무 가까워서 동네사람들은 함빡 취했다 ㅡㅡ잔 안 비우고 뭐 해유? 한 씨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다 (그림 : 강혜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