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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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달밤시(詩)/기형도 2020. 12. 9. 08:42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봄이 가고. 우리는, 새벽마다 아스팔트 위에 도우도우새들이 쭈그려앉아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맨홀 뚜껑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새들은 엇갈려 짚는 다리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바람은, 먼 남국(南國)나라까지 차가운 머리카락을 갈기갈기풀어 날렸다. 이쁜 달(月)이 노랗게 곪은 저녁, 리어카를 끌고 신작로(新作路)를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그림자는 달빛을 받아 긴 띠를 발목에 매고, 그날 밤 내내 몹시 허리를 앓았다.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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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나리 나리 개나리시(詩)/기형도 2014. 4. 28. 17:05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들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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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노을시(詩)/기형도 2013. 11. 26. 20:59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午後(오후) 6시의 참혹한 刑量(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時間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象徵(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都市(도시)는 곧 活字(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速度(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冊(책)이 되리라. 勝負(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午後 6時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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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시(詩)/기형도 2013. 11. 26. 20:57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그림 : 이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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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겨울 눈(雪) 나무 숲시(詩)/기형도 2013. 11. 26. 20:55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假面)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향(向)하여 불을 지피었다. 창(窓)너머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청결(淸潔)한 죽음을 확인(確認)할 때까지 나는 부재(不在)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距離)를 두고 그래, 심장(心臟)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완벽(完璧)한 자연(自然)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후(後)에 눈 녹아 흐르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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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겨울 우리들의 도시시(詩)/기형도 2013. 11. 26. 20:54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풀리지 않으리란 것을, 설사 풀어도 이제는 쓸모 없다는 것을 무섭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외투 깊숙이 의문 부호 몇 개를 구겨넣고 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世上에서 애초부터 우리가 빼앗을 것은 無形의 바람뿐이었다. 불빛 가득 찬 황량한 都市에서 우리의 삶이 한결같이 주린 얼굴로 서로 만나는 世上 오, 서러운 모습으로 감히 누가 확연히 일어설 수 있는가. 나는 밤 깊어 얼어붙는 都市앞에 서서 버릴 것 없이 부끄러웠다. 잠을 뿌리치며 일어선 빌딩의 환한 角에 꺾이며 몇 타래 눈발이 쏟아져 길을 막던 밤, 누구도 삶 가운데 理解의 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숨어 있는 것 하나 없는 어둠 발뿌리에 몸부림치며 빛을 뿌려넣은 수천의 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