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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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서생역시(詩)/정일근 2022. 3. 13. 09:24
기차가 보지 못하고 지나쳐 갈 때 많지만 새끼손가락처럼 숨은 작은 역 저기 있네 기차를 기다려 꽃잎처럼 피었다 기차를 떠나보내며 꽃잎처럼 지는 봉숭아꽃처럼 키 작은 서생역 기적소리 울리며 기차가 멈춰서면 누나의 손톱에 물든 봉숭아 꽃물처럼 온몸 빨갛게, 온몸 빨갛게 꽃물 드는 서생역 동쪽바다 찾아가는 기차길 옆 키 작은 역 아차 지나쳤다 싶어 돌아보면 서쪽으로 숨어 꽃물 든 손을 흔드는 서생역 있네 서생역 (Seosaeng station, 西生驛)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한국철도공사 동해선의 철도역이다. 간절곶 해맞이 행사 때나 하계 피서기에는 간혹 특별 열차가 정차하기도 하였다.2007년 6월 1일 부터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으나. 2021년 12월 28일 동해선 광역전철 일광 ~ 태화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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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감은사지.1시(詩)/정일근 2019. 11. 29. 12:06
탑은 달을 꿈꾸었는지 몰라 버려진 세월의 뱃속 가득 푸른 이끼만 차고 변방(邊方)의 돌들의 이마는 시나브로 금이 갔다 그 금 사이 무심한 바다가 들여다보곤 돌아갔다 천 년(千年) 전 바람은 피리구멍 속에 잠들었고 신화는 유사(有史) 행간 사이 숨어 버렸다 문득문득 사라진 절의 풍경(風磬)소리 들리고 항아리마다 칠월 보름달이 떠오를 때 저기 사랑하는 신라여인이 긴 회랑(回廊)을 돌아간다 탑 속 빈 금동사리함에 누운 잠아 천 년(千年)의 사랑아 내가 너를 안을 수 있다면 ......돌 속에 묻힌 혀는 무겁기만 한데 항아리 속에서 떠오른 누우런 달이 둥근 맨발로 걸어 탑 속으로 숨어든다 어허 탑마다 즐거운 만삭(滿朔)이다 내가 탑이다 (그림 : 김상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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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옛집 진해시(詩)/정일근 2019. 5. 31. 19:21
내 삶은 아직도 길 위에 있다 지친 두 발 기진한 육신 허기진 비애가 하루를 마감할 때 돌아가 옛집 더운 아랫목에 굽은 허리 묻고 잠들고 싶다 진해시 여좌동 3가 844번지 굴다리 지나 다닥다닥 산 위까지 둥지 틀고 식솔 거느린 번지마다 날 저물면 저 빼곡한 불빛 내 영혼의 일부가 그 불빛 속에서 자랐다 먼 사람 그리웁듯 그리운 진해 옛집 지금도 내 이름의 우편물이 쌓이고 꽃밭에도 봄꽃 흐드러지겠다 사월이면 꽃 지고 연초록 새잎들 신생하겠다 내 영혼은 집 떠나 길 위에서 상처받고 삶에 등 배길 때마다 백열전구 불빛 붉은 마루 저녁 밥상가로 둘러앉던 식구들처럼 더운 국에 밥 말아 먹던 뜨거운 밥숟갈처럼 그리운 옛집 진해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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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연가시(詩)/정일근 2019. 5. 4. 23:54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 하루 스물네 시간을, 일 년 삼백예순닷새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 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랑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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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무제치늪의 봄시(詩)/정일근 2019. 3. 31. 12:18
마음을 얻어야 손이 순응하는 법이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위해 봄은 오고 바라볼 줄 아는 손을 위해 꽃은 핀다 물이 만든 물의 나라 무제치(舞祭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물이니 물은 다투지 않고 평등하게 스며들고 겸허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꽃을 기다려 삼월 봄이 오고 봄을 기다려 사월 꽃이 피는 그 착한 물들이 빚어내는 빛나는 봄 오랜 마음의 친구가 내미는 손처럼 그 따뜻한 손 꽉 잡아보고 싶은 무제치늪의 봄 무제치늪 :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조일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높지 울주군에 위치한 정족산 정상아래 위치하고 있다. 무제라는 이름은 기우제를 뜻하는 '무우제'의 경상도 말이며, 물이 많은 곳이라 하여 '물치'로 불리기도 한다. 50여 종의 습지식물을 포함한 257종의 희귀 동식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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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앞으로 나란히시(詩)/정일근 2019. 1. 11. 15:49
운동장 조례시간이면 사마귀 난 내 손등이 슬펐다 어머니는 술 팔고 우리는 아비 없는 자식이었다 하나 뿐인 방에 까지 손님이 들면 동생은 도둑 고양이처럼 웅크려 부뚜막에 누워 잠들고 안데르센 동화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림숙제를 해야 하는데 밤늦게 술주전자 나르며 같은 반 고 가시내 볼까 부끄러워 나는 자꾸만 달아나고 싶었다 앞으로 나란히 앞으로 나란히 내미는 손을 앞질러 달아나고 싶었다 돌아보면 웅크리고 있는 쓸쓸한 유년의 삽화 한 장 그 풍경들 하얗게 지워져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부끄러운 손등 감추지 못하고 앞으로 나란히 앞으로 나란히 (사진 : 네이버 노이만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