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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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나에게 사랑이란시(詩)/정일근 2015. 5. 28. 16:18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마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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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모든 기차는 바다로 가고 있다시(詩)/정일근 2015. 5. 24. 00:40
호남선 철길이 익산역에서 슬그머니 남쪽바다로 전라선을 풀어 놓는 것은 그건 기차가 바다를 그리워해서이다. 호남들판 동서로 가로질러갈 때 지평선 바라보며 입 꾹 다문 기차가 임실 남원 곡성 구례 지나며 기적소리 점점 요란해지는 것은 그건 기차가 바다내음을 맡아서이다. 그 때 누군가 안절부절 못한 채 킁킁거리며 차창을 내다본다면 그 사람은 지금 바다로 가고 있다 꿈꾸는 얼굴로 종착역을 기다리며 기차표 한 장 꼭 쥐고 있다면 그 사람도 지금 바다로 가고 있다. 날개 접고 막차로 야반도주한 갈매기가 새벽 첫차 타고 와 다시 날개 펴는 바다 서대 낙지 볼락 멸치 주꾸미 갯장어가 남부여대 보따리 이고 지고 이사 갔다, 언제 돌아왔는지 제 새끼 가득 치고 사는 바다 젊어서 달아난 푸른섬, 섬들이 속속 귀항해 다도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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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겨울의 길시(詩)/정일근 2015. 2. 10. 01:09
춥고 버려진 것들 서로서로 껴안아 길을 만든다 응달진 밑바닥은 진눈깨비 다 받아 뽀도독뽀도독 눈길 만들고 두툼하게 어는 얼음 안고 개울은 강으로 가는 얼음길 만든다 아홉 새끼 제 품에 다 쓸어안고 아낌없이 주는 어미 개의 피와 살로 영하의 겨울밤에 생명의 길은 거룩히 불 밝히고 아득히 먼 하늘 끝, 별과 별이 손잡아 하늘의 길 미리내는 빛난다 사랑이여, 당신이 날 껴안아 이 겨울 은현리 빙판길 되어도 좋다 그걸 슬픔이라 불러도 좋다 그 위로 누군가 또 누군가 걸어갈 것이니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반들반들한 발길 거기 날 것이니 은현리 : 울산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그림 : 한희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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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가을 억새시(詩)/정일근 2014. 11. 16. 13:11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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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폭설을 기다리며시(詩)/정일근 2014. 2. 17. 12:06
남쪽에 큰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믿기로 하자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눈을 기다리기로 하자 무엇인가를 간절히 믿어본지 오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려본지 참 오래다 나는 마당에 나가 벚나무와 함께 직립으로 서서 고립무원의 폭설을 기다린다 나에게서 출발했던 모든 길을 버리고 나에게로 돌아왔던 모든 길을 버리고 오직 하늘의 길을 기다린다 돌아보면 내가 택했던 길들은 나를 버렸고 나를 택했던 길들은 내가 버렸다 나는 얽히고설킨 세상의 그 길을 하얀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다 내가 운명으로 믿었던 손금 속의 길을 지우고 내 몸 속으로 퍼져있는 붉은 실핏줄의 길을 지우고 내 안과 밖의 모든 경계를 지워버렸을 때 하늘에서는 폭설이 내려와 지도를 만들 것이니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는 순백의 지도 위에 발자국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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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시(詩)/정일근 2014. 2. 13. 11:07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