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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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착한 詩시(詩)/정일근 2014. 2. 9. 13:04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방어 새끼는 마래미, 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 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그림 : 신종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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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은현리 홀아비바람꽃시(詩)/정일근 2014. 2. 9. 13:01
산다는 것은 버리는 일이다 내 심장 꺼내고 그 자리에 채워 넣었던 첫사랑 했으나, 그해 가을 진해 바다로 투신하고 싶었던 어린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던 심장의 통증까지 추억에서 꺼내 내버린 지 오래다 詩에 목숨 걸었으나, 당선을 알려주던 노란 전보 첫 청탁서, 첫 지면, 첫 팬레터...詩로 하여 내 전부를 뛰게 했던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가슴 설레며 읽은 신간 서적 책장에 꽂아둔 채 표지가 낡기도 전에 잊히듯이 산다는 것은 또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이다 만남보다 이별이 익숙한 나이가 되면 전화번호 잊어버리고 주소 잊어버리고 사람 잊어버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모두 주머니 뒤집어 탈탈 털어 잊어버린다 행여 당신이 남긴 사랑의 나머지를 내가 애틋하게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당신의 검산이 틀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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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사월에 걸려온 전화시(詩)/정일근 2014. 2. 4. 17:09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 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그림 : 이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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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매생이시(詩)/정일근 2013. 12. 29. 15:47
다시 장가든다면 목포와 해남 사이쯤 매생이국 끓일 줄 아는 어머니를 둔 매생이처럼 달고 향기로운 여자와 살고 싶다 뻘바다에서 매생이 따는 한겨울이 오면 장모의 백년손님으로 당당하게 찾아가 아침저녁 밥상에 오르는 매생이국을 먹으며 눈 나리는 겨울밤 뜨끈뜨끈하게 보내고 싶다 파래 위에 김 잡히고 김 위에 매생이 잡히니 매생이를 먹고 자란 나의 아내는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여자일거니, 우리는 명주실이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할 것이다 남쪽에서 매생이국을 먹어본 사람은 안다 차가운 표정 속에 감추어진 뜨거운 진실과 그 진실 훌훌 소리내어 마시다 보면 영혼과 육체가 함께 뜨거워지는 것을 아, 나의 아내도 그러할 것이다 뜨거워지면 엉켜 떨어지지 않는 매생이처럼 우리는 한몸이 되어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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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제주에서 어멍이라는 말은시(詩)/정일근 2013. 12. 19. 22:55
따뜻한 말이 식지 않고 춥고 세찬 바람을 건너가기 위해 제주에선 말에 짤랑짤랑 울리는 방울을 단다 가령 제주에서 어멍이라는 말이 그렇다 몇 발짝 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어머니라는 말에 어멍이라는 말의 방울을 달면 돌담을 넘어 올레를 달려 바람을 건너 물속 아득히 물질하는 어머니에게까지 찾아간다 어멍.....,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나 ㅇ 이라는 바퀴 제 몸 때리듯 끝없이 굴리며 그리운 것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저 숨비소리 같은 것 숨비소리 : 해녀가 잠수 후 수면에서 고단 숨을 휘파람처럼 쉬는 행동 (그림 : 김길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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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부석사 무량수(無量壽)시(詩)/정일근 2013. 12. 19. 22:52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無量壽)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짤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그림 : 설종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