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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일근 - 은현리 홀아비바람꽃
    시(詩)/정일근 2014. 2. 9. 13:01

     

     

    산다는 것은 버리는 일이다

     

    내 심장 꺼내고 그 자리에 채워 넣었던

    첫사랑 했으나, 그해 가을

    진해 바다로 투신하고 싶었던

    어린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던 심장의 통증까지

    추억에서 꺼내 내버린 지 오래다

     

    詩에 목숨 걸었으나, 당선을 알려주던 노란 전보

    첫 청탁서, 첫 지면, 첫 팬레터...詩로 하여 내 전부를 뛰게 했던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가슴 설레며 읽은 신간 서적 책장에 꽂아둔 채

    표지가 낡기도 전에 잊히듯이

    산다는 것은 또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이다

     

    만남보다 이별이 익숙한 나이가 되면

    전화번호 잊어버리고 주소 잊어버리고

    사람 잊어버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모두

    주머니 뒤집어 탈탈 털어 잊어버린다

     

    행여 당신이 남긴 사랑의 나머지를

    내가 애틋하게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당신의 검산이 틀렸다

     

    솔발산 깊은 산길에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잎 버리고 꽃잎 버리고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나도 홀로 피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인생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부터 편안하다

    편안해서 혼자 우는 날이 많아 좋다

    다시 바람 불지 않아도 좋다

    혼자 왔으니 혼자 돌아갈 뿐이다

    (그림 : 한순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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