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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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연루와 주동시(詩)/송경동 2022. 12. 29. 08:26
그간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다 더 연루될 곳을 찾아 바삐 쫓아다녔다 연루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 주동이 돼 보려고 기를 쓰기도 했다 그런 나는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어디엔가 더 깊이깊이 연루되고 싶다 더 옅게 엷게 연루되고 싶다 아름다운 당신 마음 자락에도 한 번쯤은 안간힘으로 매달려 연루되어 보고 싶고 이젠 선선한 바람이나 해 질 녘 노을에도 가만히 연루되어 보고 싶다 거기 어디에 주동이 따로 있고 중심과 주변이 따로 있겠는가 (그림 : 김봉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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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막차는 없다시(詩)/송경동 2020. 9. 19. 19:18
비 그치고 막차를 기다리고 선 가리봉의 밤 차는 오지 않고 밤바다 쪽배마냥 작은 리어카를 끌고 온 한 노인이 내 앞에 멈춰 선다 그이는 부끄럼도 없이 휴지통을 뒤져 내가 방금 먹고 버린 종이컵이며 빈 캔 따위를 주워 싣는다 가슴 한 가득 안은 빈 캔에서 오물이 흘러 그의 젖은 겉옷을 한 번 더 적신다 내겐 쓰레기인 것들이 저이에게는 따뜻한 고봉밥이 되고 어떤 날은 한 소절의 노래 한 잔의 술이 되어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눈물이라도 돈이 된다면 내 한 몸 울어줄 것을. 어둔 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섰는가 저기 두 눈 뜨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선 내가 실려 가는데 저기 두 눈 뜨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선 한 세월이 멀어져 가는데 (그림 : 권대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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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화폐시(詩)/송경동 2020. 9. 19. 19:15
오늘부터 내 돈은 저 나뭇잎새들 노란 은행나뭇잎은 만 원짜리라 하고 빨간 단풍잎들은 5천원권 아직 여름의 퍼런 멍이 남아 있는 것들은 천원권이라고 하자 생각하니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고 가장 윤이 나는 종이에 ‘돈’을 찍는 마음을 알 것도 같고 세상의 모든 화폐가 정작 스스로는 아무런 쓸모도 없이 온갖 진귀한 것들을 사고 파는 일에 쓰이는 일을 알 것도 같고 모든 빛나는 것들을 온몸에 치렁치렁 매달고 싶어하는 사람들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떨어져 가을 포도 위를 뒹구는 단풍잎들처럼 잠깐의 생을 스스로 한껏 누려보지도 못하고 다 나누어줘 버렸다고 슬퍼하지도 말자 오도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 향해 그리움의 손 흔들며 함께 했던 사람들 다 져 버렸다고 눈물짓지도 말자 저 무성한 나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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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오토인생시(詩)/송경동 2020. 9. 19. 19:12
아버지가 십 년 타고 물려준 80cc 오토바이 타고 구종점을 오른다 아버지는 이 오토바이로 오십 넘어 우유를 배달했고 백반을 배달했다 노년에 아파트 경비일을 다녔고 한때 새벽 차 다니지 않는 공사현장까지 아들아, 노가다 해서 돈 많이 벌어오라고 날 실어다 준 것도 이것이다 왔다갔다 하는 전조등 덜덜거리는 계기판 깨진 바람막이, 빌어먹을 소리만 커진 마후라통 딱 하나 성성한 거라며 브레이크 하나뿐인데 곰곰 아버지 브레이크 한 번 밟아볼 새 없이 달려온 인생이 붙어버린 엔진처럼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림 : 김기홍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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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지나온 청춘에 바치는 송가 6시(詩)/송경동 2020. 9. 19. 18:57
- 영등포역 연가 고향이 전남 벌교에 터 잡은 곳이 구로동이다 보니 수없이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맨 처음은 스무 살이었다 가방이 없어 종이 백 세 개에 잔뜩 옷가지가 담겨 있었다 스물셋 두 번째 상경 땐 큰 가방 하나에 작은 가방 두 개였다 십여 년이 흘러 다시 내릴 땐 한 여인과 갓 돌 지난 조그만 아이가 내 옆에 있었다 창피하다고 젊어서는 안 들고 가겠다 했지만 체면보다 생활이 먼저임을 깨달아갈 무렵엔 조기거나 양태거나 떡이 꽁꽁 얼려 있는 상자 두어 개를 낑낑거리며 들고 내려왔다 어떤 땐 잎 지는 가을이었고 어떤 땐 조용히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바람 불던 날 비 오던 날도 많았다 다시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이 악물던 날도 많았고 어떻게든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다시 발을 떼던 때도 많았다 아이도 다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