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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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결핵보다 더 무서운 병시(詩)/송경동 2020. 9. 19. 18:19
종로2가 공구상가 골목 안 여인숙 건물 지하 목욕탕을 개조해 쓰던 일용잡부 소개소에서 날일 다니며 한 달 십만 원짜리 달방을 얻어 썼지 같은 방 친구의 부업은 타짜 한 번에 오만원 이상은 따지 말 것 한 달에 보름은 일을 다녀야 의심받지 않음 한 곳에 석 달 넘게 머물지 말 것 원칙 있던 그가 가끔 사주는 오천 원짜리 반계탕이 참 맛있었지 밤새워 때 전 이불 속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내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꼭 성공하라고 떠나는 날에야 자신이 결핵 환자라 고백했지 그가 떠난 날 처음으로 축축하고 무거운 이불을 햇볕 쬐는 여인숙 옥상 빨랫줄에 널었지 내게는 결핵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이라는 병이 있다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했으니, 쌤쌤 괜찮다고 괜찮다고 어디에 가든 들키지 말고 잘 지내라고 빌어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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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그해 여름장마는 길었다시(詩)/송경동 2020. 9. 19. 18:18
그들의 싸움은 장마처럼 길었다 와? 와아? 와아? 하며 뱃일을 다니는 사내가 밑도 끝도 없이 세간살이 하나하나를 깨나갈 때마다 부둣가 다방엘 다니는 동거녀는 썰물에 씻기는 모래알처럼 쓰러지며 와아? 와아? 와 그라는데 하며 흐느꼈다 나는 그들의 옆방 월세 10만원짜리 생활 속에 텅빈 소라껍질마냥 기구하게 누워 불도 켜지 못한 채 서러웠다 모든 건, 이 지긋지긋한 장마비 때문이라고 위안해 보지만 떨쳐지지 않는 기억들 아버지는 내게 끈질긴 미움과 풀어지지 않는 말들의 매듭과 쟁그랑 깨어지는 가슴을 물려주었다 폭풍우에 휩쓸려 온 해초들마냥 파도처럼 우악스러운 손아귀 속에서 쥐어뜯기던 어머니 퍼런 멍으로 보이던 달 새벽이면 어시장 주변을 배회하던 개들 몇 도막난 생선처럼 도매금으로 뭉툭뭉툭 잘려 나가던 젊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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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외등시(詩)/송경동 2020. 9. 15. 18:27
당신과 나도 외등이었다 멀리 떨어져 내 앞의 작은 길을 밝히는 것만도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내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붙잡고 싶은 사람도 많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저 달도 외등 저 바다에 눈동자 붉은 해도 외등이고 저 수많은 별들도 수천억 년 혼자 뜨고 지는 외등이니 그런 외등들이 모여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고 쉬어 갈 모퉁이 울고 갈 공터 다시 걸어 갈 희망과 응원의 빛이 되어주느니 저 수많은 외등들이 모여 때론 시대를 환하게 밝히는 커다란 등불도 되나니 당신과 나의 붉은 영혼이 전력을 다해 그리움만 태우던 저 외등의 필라멘트였더라도 아파하지 말자 (그림 : 이갑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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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외상일기시(詩)/송경동 2018. 10. 22. 09:50
셋방 부엌창 열고 샷시문 때리는 빗소리 듣다 아욱, 아욱국이 먹고 싶어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또 하루치의 일기를 쓴다 오늘은 오백원어치의 아욱과 천원어치 갱조개 매운 매운 삼백원어치의 마늘맛이었다고 쓴다. 서러운 날이면 혼자라도 한 솥 가득 밥을 짓고 외로운 날이면 꾹꾹 누른 한 양푼의 돼지고기를 볶는다고 쓴다 시다 덕기가 신라면 두 개라고 써 둔 뒷장에 쓰고, 바름이 아빠 소주 한 병에 참치캔 하나라고 쓴 앞장에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는 쓰지 못하고 해방 평등이라고는 쓰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하루살이 날파리가 말라붙어 있는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쓰린 가슴 위에 쓰고 또 쓴다 눈물국에 아욱향 갱조개에 파뿌리 씀벅 나간 손 끝 배어나온 따뜻한 피 위에 꾸물꾸물 쓰고 또 쓴다 (그림 : 전성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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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나는 다만 기회가 적었을 뿐이다시(詩)/송경동 2017. 6. 10. 09:49
나는 집을 나서면 정체불명의 남성이었다 나이도 꿈도 취향도 알 수 없이 치솟은 남근이었다 나는 집만 나서면 먹이를 좇는 음흉한 시선이었고 싸지 못하면 망토라도 벗고 싶은 바바리맨이었으며, 어느 밤길 위험한 욕망이었으며 남의 여자를 탐하는 이웃집 남자였으며 젊은 여성만 탐하는 늙은 짐승이었으며 몇 번 탐하고 나면 심드렁해져 또 다른 식민지를 찾는 끝없는 정복자였으며 나는 집만 나서면 겉으로는 정의와 역사와 혁명 어쩌고를 떠드는 활동가인 양, 투사인 양했지만 윤리적 인간인 양,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어떤 양심인 양했지만 사실은 ‘남자’라는 폭행에 길들여진 어떤 짐승의 연대기이기도 했으니 제국주의 폭력과 자본의 폭력과 내 안의 가부장적 폭력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지만 결코 가부장 남성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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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참, 좆같은 풍경시(詩)/송경동 2017. 6. 7. 11:22
(낭송 : 임호기) 새벽 대포항 밤샘 물질 마친 저인망 어선들이 줄지어 포구로 들어선다 대여섯 명이 타고 오는 배에 선장은 하나같이 사십대고 사람들을 부리는 이는 삼십대 새파란 치들이다 그들 아래에서 바삐 닻줄을 내리고 고기상자를 나르는 이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석회처럼 센 노인네들뿐 그 짭짤한 풍경에 어디 사진기자들인지 부지런히 찰칵거리는 소리들 그런데 말이에요 이거 참, 좆같은 풍경 아닙니까 부자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시인들은 나이 먹을수록 대접받는데 우리 노동자들은 왜 늙을수록 더 천대받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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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쇠밥시(詩)/송경동 2015. 9. 9. 00:23
흙먼지에 섞어 먹는 밥 싱거우면 녹 가루에 비벼 먹고 석면 가루도 흩뿌려 먹는 밥 체인블록으로 땡겨야 제 맛인 밥 찰진 맛 좋으면 오함마로 떡쳐 먹고 일 없으면 고층 빔 위에 혼자라도 서서 먹는 밥 시큼한 게 좋으면 오수관 때우며 먹고 새콤한 게 좋으면 가스관 때우며 먹고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 하는 밥 무엇보다 나눠 먹는 밥 1톤짜리 앵글 져다 공평하게 나눠 먹고 크레인 포클레인 지게차 기사도 불러 함께 비지땀 흘리며 먹는 밥 석양에 노을이 질 때면 아내와 아이도 모두 사이좋게 앉아 먹는 그 쇠밥 (그림 : 심우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