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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나는 다만 기회가 적었을 뿐이다시(詩)/송경동 2017. 6. 10. 09:49
나는 집을 나서면
정체불명의 남성이었다
나이도 꿈도 취향도 알 수 없이
치솟은 남근이었다
나는 집만 나서면
먹이를 좇는 음흉한 시선이었고
싸지 못하면 망토라도 벗고 싶은
바바리맨이었으며, 어느 밤길 위험한 욕망이었으며
남의 여자를 탐하는 이웃집 남자였으며
젊은 여성만 탐하는 늙은 짐승이었으며
몇 번 탐하고 나면 심드렁해져
또 다른 식민지를 찾는 끝없는 정복자였으며
나는 집만 나서면
겉으로는 정의와 역사와 혁명 어쩌고를 떠드는
활동가인 양, 투사인 양했지만
윤리적 인간인 양,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어떤 양심인 양했지만
사실은 ‘남자’라는 폭행에 길들여진
어떤 짐승의 연대기이기도 했으니
제국주의 폭력과
자본의 폭력과
내 안의 가부장적 폭력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지만
결코 가부장 남성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던
나는 다만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이다
존엄할 기회가 아닌
타락할 기회가
(그림 : 김동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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