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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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누부 손금시(詩)/박태일 2019. 12. 20. 11:38
이 꽃 저 꽃 다 지는 오월 아카시아 길 따라 삼랑진 간다 용전 사기점 누부 만나러 간다 자성산 능선이 불쑥 휘돌아 내리는 소리 멀리 먼 주소의 비라도 기별하려는지 자두 속살같이 젖은 그리움이 봇물 트이듯 흘러 흘러서 어릴 적 누부가 던져 보낸 웃니 아랫니를 생각하며 매지구름 뒤우뚱 어미 찾는 시늉을 본떠 생림 사촌 독뫼 이름 고운 마을도 지나고 막걸리통 농약병 뒹구는 논둑길 웃으며 걸어 새삼 덩굴 울을 친 골짝 검은 가마자리 누부집 간다 그릇도 질그릇이란 한자리 눌러 살며 불심 센 참나무 참 장작으로 키워 낸 자식이라서 못물에 소낙비 들고 뒤주에 생쥐 들 듯 센 불 낮은 불 오내리는 소리 사발 금 먹는 소리 귀얄 술술 날그릇 덤벙덤벙 담그던 슬픔도 물레질 한 발길로 고임돌에 올라 앉히고 질흙 같은 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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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축산항(丑山港). 5시(詩)/박태일 2019. 11. 26. 09:09
사람들의 기억은 묻어 버리라더군, 바다는 은밀히 가슴에 섬을 세웠다 지워 버리는 아이들의 놀이. 등대길 방파제를 따라가면 수평선(水平線)은 큰 괄호를 이루어 아득하더군. 썰물의 한때를 모래톱에서 찰박이는 조가비 상심(傷心)한 몇몇은 나를 멈춰두고 잦은 파도의 뒷걸음만 오래 보라더군. 축산항(丑山港)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있는 항구 영덕의 대표적인 어항(漁港)으로, 1924년 조성되었다. 가자미·문어·오징어를 비롯해 근처의 강구항과 마찬가지로 대게로 유명하며, 대게 위판이 열리는 전국 5개항 중 한 곳이다. 대게원조마을로 알려진 차유마을과도 가깝다. 와우산이 북풍을 막고, 대소산이 서풍을, 죽도산이 남풍을 막아 예전부터 최고의 피항지로 이름 높았다. 현재는 ‘축산항 푸른바다마을’이라 불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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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어머니와 순애시(詩)/박태일 2019. 11. 25. 11:12
어머니 눈가를 비비시더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비시더니 어린 순애 떠나는 버스 밑에서도 잘 가라 손 저어 말씀하시고 사람 많은 출차대 차마 마음 누르지 못해 내려보고 올려보시더니 어머니 털옷에 묻는 겨울바람도 어머니 비비시더니 마산 댓거리 바다 정류장 뒷걸음질 버스도 부르르 떨더니 버스 안에서 눈을 비비던 순애 어디로 떠난다는 것인가 울산 방어진 어느 구들 낮은 주소일까 설묻은 화장기에 아침을 속삭이는 입김 어머니 눈 비비며 돌아서시더니 딸그락 그락 설거지 소리로 돌아서 어머니 그렇게 늙으시더니 고향집 골짝에 봄까지 남아 밤새 장독간을 서성이던 눈바람 바람. (그림 : 김봉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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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탑리 아침시(詩)/박태일 2017. 3. 15. 11:50
송아지가 뜯다 만 매지구름도 있다 소시장 지나 회다리 건너 첫 기차는 들을 질러 북으로 가고 마지막 배웅은 산수유 노란 꽃가지 차지다 탑리는 다섯 층 돌탑 마을 조문조문 문짝 떨어진 감실 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탑리 아이들 경 읽는 소리를 귀 세워 듣고 있는 저 금성산. 탑리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義城 塔里里 五層石塔) : 신라 시대의 오층석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7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석탑의 초기형식을 보이는 석탑으로 초층 옥신(初層屋身)은 목조건물을, 옥개석은 전탑(塼塔)을 모방한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총 높이가 9.65m로서 단층기단(短層基壇) 위에 섰는데 기단은 모두 별석(別石)으로 된 지대석(址臺石), 우주(隅柱), 탱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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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소탕 개탕시(詩)/박태일 2016. 8. 15. 15:01
소탕 개탕 가운데 나는 개탕이다 백주 황주 가운데 나는 백주다 왕청시장 늦은 점심 미끌미끌 얼음발에 땅밑 일층 세 집 가운데 동포 밥집 고수풀도 듬뿍 개고기는 찢어 가늘어서 고사리 나물을 접시째 얹은 꼴인데 백주 잔이 작은 뜻은 가까운 백초구 백초구 어느 아바이가 장 걸음에 석 잔을 넘겨 버스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이다 왕청 길 나 같은 한국 아바이가 두 잔을 넘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이다 병풍산 나무 계단 숨 골라 오르게 하기 위한 일이다 소탕 개탕 가운데 나는 개탕이다 백주 황주 가운데 나는 백주다 (그림 : 김재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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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가을 악견산시(詩)/박태일 2014. 9. 23. 00:12
악견산이 슬금슬금 내려온다 웃옷을 어깨 얹고 단추 고름 반쯤 풀고 사람 드문 벼랑길로 걸어 내린다 악견산 붉은 이마 설핏 가린 채 악견산 등줄기로 돋는 땀냄새 밤나무 밤 많은 가지를 툭 치면서 툭 어이 여기 밤나무 밤송이도 있군 중얼거린다 악견산은 어디 죄 저지른 아이처럼 소리없이 논둑 따라 나락더미 사이로 흘러 안들 가는 냇물 힐금힐금 돌아보며 악견산 노란 몸집이 기우뚱 한 번 두 번 돌밭을 건너뛴다 음구월 시월도 나흘 더 넘겨서 악견산이 슬금슬금 마을로 들어서면 네모 굽다리밥상에는 속좋은 무우가 채로 오르고 건조실에 채곡 채인 담배잎 외양간 습한 볏짚 물고 들쥐들 발발 기는 남밭 나무에 고랑으로 갈잎도 덮이고 덜미 잡힌 송아지같이 나는 눈만 껌벅거리며 자주 삽짝 나서 들 너머 자갈밭 지나 검게 마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