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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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약쑥 개쑥시(詩)/박태일 2014. 9. 23. 00:11
팔령치 넘어 전라도 전라도 지나 지리산 뜻 높은 절집에 뜻 높은 스님은 없고 뒤듬바리 벅수 짝으로 번을 선 곳 실상사 건너 상황에 가자 닥껍질 삶은 물이 돌돌 도랑을 데우는 골짝 마을 이름도 성도 자식 없어 나선 시집살이 욱동이 동생 친정 일도 드난살이 삼십여 년 홀로 조금밥 헤며 다 솎아버린 조씨 할머님은 마당귀에 다소곳 숨어 죽은 약쑥을 보면서 콩나물시루 삼발이 마냥 굽은 허리로 집안을 도시는데 한 해 한 번 마을에 약쑥 공양 베푸시는 할머님 머리 검불 허연 귓가로 앞집 며느리 새로 치는 꿀벌 소리가 저승마루인 듯 아득하게 이엉을 얹고 장독대 함박꽃 뚝 지는 날 테메운 몰두무 곁으론 지난해 장대비 소리 다시 후드륵 눈 따갑네 이 봄날 손금을 파고드는 따뜻한 쑥뜸 연기 할머님 저녁 끼니는 어떠실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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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그리운 주막(酒幕)시(詩)/박태일 2014. 9. 22. 23:52
1. 산그늘 하나 따라잡지 못하는 걸음이 느릿느릿 다가서는 거기, 주막 가까운 북망(北邙)에 닿아라. 동으로 머리 누이고 한 길 깊이로 다져지는 그대 도래솔 성긴 뿌리가 새음을 가리고 나직한 물소리 고막을 채워 흐른다. 입 안 가득 머금은 어둠은 차마 눌 주랴. 마른 명주 만장 동이고 비틀비틀 찾아가거니 흐린 잔술에 깨꽃더미처럼 흔들리는 백두(白頭). 그대의 하관(下棺)을 엿보는 마음이 울음을 따라 지칠 때, 고추짱아 고추짱아 한 마리 헤젓는 가을 하늘 저 끝. 2. 가랑가에 앉아서 노래 불렀다. 쉰소리 마른소리 다 모여서 가버린 사람을 노래 불렀다. 울울이 차 넘기는 바람 보릿대 까맣게 씨 털며 파꽃이 매워 이 산등 온통 한 무덤으로 가차이 가차이 닿이는 하늘. 빚진 사내 곱은 사내 섭섭한 사내 어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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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황강 9시(詩)/박태일 2014. 9. 22. 23:29
황강 물 굴불굴불 황강 옥이와 귀엣말 즐겁습니다 황강 모래 엄지 검지 발가락 새 물꽃 되어 흐르듯이 간지러운 옛말이 들리는 봄 재첩 볼우물이 고운 옥이 마을 이모와 고모가 한 동기를 이루며 늙어간 버들골로 물안개는 디딜 데 없이 아득하였습니다 호르르르 물잠자리 홀로 물수제비를 띄우고 옥양목 파란 수숫대 바스락 소매를 잡습니다 옴두꺼비가 멀리서 개구리처럼 울어도 예사로운 날 황강 옥이와 헤어질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육십 리 나루 육십 리 황강 옥이는 황강 육십 리 옛 노래 능청거리는데 혼자 사는 옥이 엄지 검지 손톱이 뭉개져 까맣습니다 물총새 뒷꼭지를 닮았습니다. (그림 : 이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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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황강 8시(詩)/박태일 2014. 9. 22. 23:28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 돌아보면 해오라기 강턱으로 애기똥 괭이밥은 노랗게 피고 잎마다 남이 분이 이름 붙여보는 봄날 허리 끊긴 밤길이었다가 한 때 땅버들 골짝이었다가 간밤 이랑 고랑 허물어지던 빗소리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 지게 째 얹고 다닌 징검돌 세월도 활대같이 굽은 황강 물살도 세상 길바닥은 어디라 다 문지방 아지랑이 밥물처럼 끓는 모랫길 따라 봄사람 울음소리 서럽네 봄사람 울음소리 서럽네 오호이 햇살 천지 온 산엔 소피 진달래 길 그친 하늘엔 구름 발자국. (그림 : 박용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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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선동(仙洞) 저수지시(詩)/박태일 2014. 9. 22. 23:25
선동은 푸른 동리 버들숲 푸른 물가로 물방개 빙빙 돌고 찔레꽂 골담초 사래 아래 의령 박가 내 사촌들 발을 씻는 곳 발을 씻다 흘러가는 닭털을 건지고 우는 두돌나기 조카 저수지 안기슭에 지붕 올린 고모 작은아버지 볼우물 이쁜 작은엄마 선동 오르는 길 올랐다 물줄기로 떠돌면 이제는 고인 물 하얗게 물때 낀 사금파리 길을 이루어 물자새 새끼들 물가로 오르고 방기 당기 물수제비 잠기는 사이사이 강갈매기 발 접어 하늘 건너 어디로 가나 고여 지새는 일가(一家) 이냥 작아지는 무덤으로 차례 누워 베롱나무 베롱꽃 흩는 버릇을 어쩔까 아버지 마시던 물을 아들이 마시고 그 물에 고인 할아버지를 손자가 찰방이는 바닥 날개짓 요란하게 솟는 까마귀 한 마리 오후 내 선동 물가에 가서 꿈같이 한 세월이 다시 일가를 이루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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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 - 불영사 가는 길시(詩)/박태일 2014. 1. 8. 15:23
구름 보내고 돌아선 골짝 둘러 가는 길 쉬어 가는 길 밤자갈 하나에도 걸음이 처져 넘어진 등걸에 마음 자주 주었다 세상살이 사납다 불영 골짝 기어들어 산다화 속속닢 힐금거리며 바람 잔걸음 물낯을 건너는 소리 빙빙 된여울에 무릎 함께 적셨다 죽고 사는 인연법은 내 몰라도 몸이야 버리면 다시 못 볼 닫집 욕되지 않을 그리움은 남는 법이어서 하얀 감자꽃은 비구니 등줄기처럼 시리고 세상 많은 절집 소리 그 가운데 불영사 마당 늦은 독경 이제 몸 공부 마음 공부 다 내려놓은 부처님은 발등에 묻은 불영지 물기를 닦으시는데 지난달 오늘은 부처님 오셨던 날 불영사 감자밭 고랑에 물그러미 서서 서쪽 서쪽 왕생길 홀로 보다가 노을에 올라선 부처님 나라 새로 지은 불영사 길 다시 떠난다 불영사(佛影寺) : 경북 울진군 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