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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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밴댕이시(詩)/김선태 2020. 9. 3. 10:29
공복에 싸락눈 들치는 저녁 만선식당에 들러 밴댕이회 한 접시 시켜놓고 철없이 날뛰던 시절 어머니 꾸지람 떠올린다 "속창아리 없는 놈" 하긴, 어미 속을 다 들어 내먹고도 허기진 그런 소갈딱지 없는 놈이었으니 그보다 더 맛깔나게 어울리는 욕은 없었을 터 이제 와 돌아보매 참회가 빗발치는데 왜, 창자 없어 물고기로 취급도 않고 버렸다는 두엄벼늘에서 주구장창 비린내 풍기며 썩어가던 그 지지리도 못난 밴댕이가 이리 맛있는 것이냐 추회를 곁들여 먹는 맛이 아프고 씩씩하지만 어찌 이리 차지고 고소한 것이냐 오늘도 기름기 잘잘 흐르는 그 맛 못 잊어 목포수협 뒷골목 허름한 만선식당 하염없이 미어터지는 것이냐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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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절명여시(詩)/김선태 2020. 7. 5. 18:18
생의 바다에서 헛물만 켰다는 후회가 밀물져올 때 불현듯 낚시가방 챙겨 떠나고 싶은 곳 있지 이름만으로도 늑대 같은 파도들이 크릉 크르릉 사납게 마음의 기슭을 물어뜯는 것 있지 아차 하면 순식간에 검푸른 파도가 삼켜버려 내로라하는 꾼들도 차마 근접을 꺼리는 삶과 죽음이 나란한 직벽에서 대물과의 한판승부가 끊어질 듯 팽팽한 반원을 그리는 곳 추락을 거듭해온 생의 굴레를 벗어나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마음 하나로 곧추서 목숨을 미끼로 채비를 던지고 싶은 절체절명의 무섭도록 황홀한 절해고도 절명여 절명여(絶命礖) : 추자 바다에 떠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깎아지른 돌섬, 특급 바다낚시 포인트로 유명하다. 제주도에서 추자도 사이에 있는 모든 무인도나 여는 그야말로 낚시 천국인데 특히 절명여가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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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백화주시(詩)/김선태 2019. 8. 23. 10:30
천태산 자락에 순하게 깃들어 사는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내게 귀한 백화주를 권한다 국화주나 매화주도 아닌 백화주는 처음이라 그 태생과 내력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한다 사시사철 천태산 일대에 피는 꽃을 따다 말려 술을 담갔는데 그 종류가 딱 백 가지라 자연스레 따라붙은 이름이 백화주란다 백 가지 꽃의 맛과 향이 들어 있으니 한꺼번에 쭉 들이켜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 보란다 지그시 눈을 감고 하나씩 맛과 향을 따라가니 천태산 골짝과 주변 논두렁 밭두렁이 펼쳐지고 꽃을 찾아왔던 벌 나비며 온갖 새들도 보이고 꽃잎에 스며든 햇빛 달빛 별빛의 숨결도 들린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 인정까지 느껴진다 했더니 오랜만에 대단한 미식가를 만났다며 기뻐한다 헤아려 보니 마을 사람들 수도 백 명쯤 된단다 하도나 신기하고 오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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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달의 보폭시(詩)/김선태 2019. 5. 20. 21:11
보름달은 제 보폭을 보여주지 않지만 달팽이보다 느리게 산을 기어올라가서 어느새 꼭대기에 둥근 얼굴을 올려놓는다 보름달은 제 날개를 보여주지 않지만 풍선보다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올라서 어느새 중천(中天)에 환한 거울을 걸어놓는다 그리하여 보름달은 제 빛의 살점을 잘게 뜯어 만물을 살린다 밤새 어둡고 적막한 것들의 친구가 된다 나무 이파리 한 잎에도 저를 내어준다 아무런 말없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움직이는 저 정중동의 은밀한 세계 느리고 둥근 것은 저토록 영원하다 (그림 : 조선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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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풍경은 공짜다시(詩)/김선태 2018. 9. 20. 11:34
풍경은 공짜다 공짜는 둥글다 텅 비어 있다 애초 주인이 없으니 보는 자가 임자다 눈은 대용량 저장 창고다 해도 달도 별도 문제없다 공짜로 세상 모든 것을 사들여도 넉넉하다 마음은 엄청난 대식가다 산과 바다와 들도 한입이다 통째로 세상을 먹어 치워도 마음껏 허기지다 눈에 보이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 모두를 공짜로 가질 수 있는 나는 가난하지만 천하제일의 부자다 행복은 공짜다 공짜는 둥글다 텅 비어 있다 애초 주인이 없으니 느끼는 자가 임자다 (그림 : 김경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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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만재도시(詩)/김선태 2018. 6. 9. 09:17
만재도를 아시나요 목포에서 뱃길로 꼬박 다섯 시간 서남쪽 망망대해 한가운데 가물거리는 섬 하도나 멀어서 ‘먼데섬’이라 불렸다는 외지고 막막한 만재도를 아시나요 배편이 드문 시절 한번 육지에 나갔다 돌아오면 일주일 혹은 한 달이 속절없이 흐르고 풍랑을 만나 아예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데 하여 육지가 더욱 사무치게 그리웠다는데 논이 없어 쌀 한 톨 구경할 수 없었고 전기가 없어 불을 밝힐 수도 없었으며 병원이 없어 그냥 생을 마감했다는데 분교마저 문을 닫고 문맹으로 돌아앉았다는데 그저 거울처럼 맑고 푸른 바다와 그 속에서 무구하게 헤엄치는 물고기와 아직도 순박한 인심을 간직한 사람들이 무슨 슬픈 운명처럼 어울려 살아가는 아득히 아름다운 만재도를 아시나요 (그림 : 정인성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