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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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땅끝에서의 일박(一泊)시(詩)/김선태 2014. 5. 14. 17:01
1. 삶이 거추장스럽게 껴입은 옷과 같을 때 내 서른 몇 살의 온갖 절망 데리고 땅끝에 와서 병든 가슴처럼 참담하게 떨리는 바다를 본다 활처럼 휘어 구부정한 마을 입구를 돌아 사자봉 꼭대기를 헉헉 기어올라서면 막막하여라, 파도만 어둡게 부서지고 있을뿐 군데군데 떠 있는 섬같은 희망도 오늘은 안개에 휩싸여 보이질 않는구나 넘어지고 다치며 불편하게 끌고 온 젊음 어디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 어디에서 깨끗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2. 막차를 놓쳐버린 적막한 어촌의 밤 주막거리 뒷 켠에 누워 밤파도소릴 듣는다 왜 살아야 하냐고 더럽게 구겨진 누더기같은 삶을 얼마나 더 살아야만 하냐고 파도는 밤새 방파제를 치며 울부짖었지만 그러나 보아라, 여기 스무 몇 가구의 집들이 야윈 어깨를 포개고 그래도 고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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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허수아비 타령시(詩)/김선태 2014. 5. 14. 16:55
언제나 기다림 밖으로 가을은 돌아와서 다시 들판에 따가운 햇살을 이고 우리는 모두 허수아비로 서 있구나 나직이 달려오는 바람결에도 흔들리우고 들판을 어지럽히는 참새떼들 바라보며 훠어이 훠어이 크게 소리 한 번 못 지르는 우리는 허수아비로 이 가을을 내맡기는구나 털린 가을을 아프게 만지작거리며 떨어진 바지 저고리 밀짚모자 그대로 자꾸만 가슴 허허로워 안으로 흐느끼며 우리는 허수아비로 이 가을을 떠나 보내는구나 언제나 기다림 밖으로 가을은 떠나가고 다시 높푸른 하늘만 뜻없이 바라볼 뿐 우리는 모두 허수아비로 서 있구나 (그림 : 김규봉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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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탐진나루에 가서시(詩)/김선태 2014. 5. 14. 16:42
고무줄 같은 그리움의 긴 끈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봄날 느닷없이 등뒤에서 어깨를 치는 추억에 이끌리며 나는 내 고향 탐진나루에 갔다 삐비꽃, 장다리꽃 마구 흐드러진 강둑을 걸어가노라면 추억은 들킨 듯 새떼처럼 일시에 날아올랐다 어린 시절 찍힌 발자욱들이 살아서 내 발목을 잡을 때 추억은 이 강둑의 끝까지 아프고 환하다 이 냇가 물 건너 먼 산으로 나무하러 가신 어머니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누나와 나는 둑에 쪼그리고 앉아 강물을 보며 울었다 장마가 지면 강물은 둑을 넘어와 논밭을 삼키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을 앞까지 쳐들어와서는 집집승들을 데리고 넓은 바다로 영영 가버렸었지 지금은 속이 안보일 만큼 물빛이 어두워졌지만 그땐 은어떼들이 조무래기들이랑 말갛게 헤엄치며 놀았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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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떠도는 곳마다 길이 있었다시(詩)/김선태 2014. 5. 14. 16:39
떠도는 곳마다 길이 있었다 떠도는 곳마다 길이 있고 길이 멈추어 선 곳에 산이 있었다 능선들이 어깨를 포갠 산마다 바위가 있고 나무들이 살고 있었다 숱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말없이 엎드린 바위와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계곡의 나무들이 저희들끼리 울창한 평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떠도는 곳마다 길이 있었다 떠도는 곳마다 길이 있고 길은 강과 바다에 닿고 있었다 자잘한 실개천들이 모여들어 커다란 강물로 출렁이고 있었다 강물은 하늘과 바람과 온갖 풍경들을 데불고 기일게 꼬리를 흔들며 넉넉한 바다로 가고 있었다 강둑을 따라 풀꽃들이 끝없이 손흔들고 있었다. 떠도는 곳마다 길이 있었다 떠도는 곳마다 길이 있고 집이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선 누군가 죽고 저 마을에선 누군가 태어나고 있었다 저물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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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겨울 항구시(詩)/김선태 2014. 5. 14. 16:36
1. 오늘도 기다림으로 발끝이 시린 삶을 적시며 눈이 내린다 밤이면 바다는 선착장 목덜미를 캄캄히 넘보며 가난에 덮혀 잠든 사람들의 꿈 속까지 젖어들고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 속을 항구의 낡은 창들이 잠깬 아이처럼 자지러지게 울고 있다 다시 밀물이 든다, 안으로 썩어버린 어제의 썰물을 져다 버리고 쪽빛 투명한 피부로 돌아오는 밀물 그러나 하룻밤 사이 제 모습을 잃어버린 썰물이 되어 다시 떠나간다 언제부터인지 종이처럼 자꾸만 물에 젖어가는 항구 사람들은 저마다 어디론가 말없이 떠나가고 헤일 수 없이 젖어 온 나날의 생채길 거머쥐고 맨발로 바다 한복판을 건너려다 익사한 아이들 누군가 돌아오라 뱃고동처럼 소리쳐 불러도 항구엔 낯선 바람소리뿐 바다 위엔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고 죽어버린 말들처럼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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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흑산도시(詩)/김선태 2014. 5. 14. 16:19
상한 짐승처럼 절뚝거리며 스며들고 싶었다 더는 갈 수 없는 작부들의 종착역 슬픔은 더 깊은 슬픔으로 달래라 했던가 늙은 작부 무릎에 슬픔을 눕히고 그네의 서러운 인생유전을 따라가고 싶었다 삭을 대로 삭은 홍어 살점을 질겅질겅 씹으며 쓰디쓴 술잔을 들이켜고 싶었다 그렇게 파란만장의 시간을 가라앉혀 제대로 된 슬픔에 맛이 들고 싶었다 때론 누추한 패잔병처럼 자진 유배를 떠나고 싶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천형의 유배지 절망은 더 지극한 절망으로 맞서라 했던가 후미진 바닷가에 갯고둥 하나로 엎어져 흑흑 파도처럼 기슭을 치며 울고 싶었다 다시는 비루한 싸움터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애간장 까맣게 타버린 한 점 섬이 되고 싶었다 (그림 : 정연갑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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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물북시(詩)/김선태 2014. 1. 20. 11:43
저수지 속에는 아무래도 저수지 속에는 손가락으로 가만 건드리기만 해도 바람의 입술이 살짝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입을 점점 크게 벌리는 그런 예민한 여자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여자가 커다란 물북을 끼고 앉아 한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세게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은 느리고 둥근 선율을 피워 올릴 것이다. 저수지의 심금(心琴)을 온통 울리는 저 정중동의 물북! 네가 처음 내게로 건너왔을 때 둥둥, 내 마음의 심연이 저러했을 것이다 아아, 혼자서 혼자서만 갇혀 울던 다락방 벙어리 냉가슴이 또 저러했을 것이다. 저 절창으로 하여 오늘 고요한 갈대숲 전체가 아스스 흔들리고 수면에 비친 햇빛이며 달빛까지도 잘게 흐느끼며 전율하는 것이다. (그림 : 정봉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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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백련사 오솔길에 들다시(詩)/김선태 2014. 1. 15. 14:22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오솔길 넘습니다. 초입부터 춘삼월 햇빛이 명랑하게 팔짱을 끼는데 어서 오라, 진달래꽃들 화사하게 손목을 잡습니다. 오솔길이 만덕산의 품속으로 나를 끌고 갑니다. 만덕산이 제 마음속으로 가느다랗게 오솔길을 불러들입니다. 산길이 산의 높낮이로 굽이치듯이 나도 오솔길을 따라 굽이치다가 잠깬 계곡의 물소리 만납니다. 생각해 보면, 산길은 산의 마음을 따라가는데 나는 무엇을 좇아 어디를 아수라장 헤매었던 걸까요. 계곡 물소리는 산의 중심을 깨우며 아래로 흐르는데 나는 또 삶의 어느 주변만을 헤매다 위로만 눈길을 흘렸던가요. 관목 숲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마음 한켠 잔설처럼 녹지 않는 상처들을 아프게 찌릅니다. 길섶에 앉아 쉬자니 문득 풀꽃들이 말을 붙여 옵니다. 네게도 언제 오솔길이 있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