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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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남산, 11월시(詩)/황인숙 2022. 11. 3. 15:46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그림 : 임진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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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해방촌, 나의 언덕길시(詩)/황인숙 2018. 5. 13. 19:41
이 길에선 모든 게 기울어져 있다 정일학원의 긴 담벼락도 그 옆에 세워진 차들도 전신주도 오토바이도 마을버스도 길가에 나앉은 툇돌들도 그 위의 신발짝들도 기울어져 있다 수거되기를 기다리는 쓰레기 봉투들도 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도 가내공장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도 무엇보다도 길 자신이 가장 기울어져 있다. 이 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몸이 앞으로 기울고 내려올 때면 뒤로 기운다. 이름도 없고 번호도 없는 애칭도 별명도 없는 서울역으로 가는 남영동으로 가는 이태원으로 가는 남산 순환도로로 가는 그외 어디로도 가고 어디에서든 오는 급, 경사길. (그림 : 박주경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