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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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슬픔이 나를 깨운다시(詩)/황인숙 2017. 6. 13. 11:28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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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입춘(立春)시(詩)/황인숙 2017. 2. 6. 19:45
된바람 타고도 빠져나가지 못한 가랑잎들 한구석에 쌓여 바스라지고 이따금 비둘기 내려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다 날아가버리고 목마른 겨울분수 빙 둘러서서 꿈에 든 벚나무들 깰락 말락 입춘(立春) : 24절기의 하나. 음력 1월 중에 있다. 태양의 황경이 315°이며, 봄이 시작되는 날이다. 가정에서는 콩을 문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대문기둥·대들보·천장 등에 좋은 글귀를 써붙인다. 입춘이 되면 대문이나 기둥에 한 해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며 복을 바라는 글귀를 붙이는데 이런 것을 입춘축(立春祝)이라고 한다. (그림 : 김지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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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세월의 바람개비시(詩)/황인숙 2017. 1. 28. 16:17
나는 우두커니 바라보네 빨갛고 파랗고 노란, 커다란 바람개비들 창공을 배경으로 모여 서서 바람을 기다리네 나도 기다리네 바람이 몰려오면 날개 끝에서 저마다 색색 바람 입자 튕기며 눈부시게 도는 바람개비들! 다만 바라보며 탄성 지르네 오랜 기억이 들썩들썩 떠오르네 색종이를 삼각형으로 두 번 접었다 편다 모서리마다 공작가위로 오린다 네 끝을 한가운데로 오므려 모아 수수깡에 압정으로 꽂는다 돌아라, 알록달록 어린 날 빨강 바람개비 파랑 바람개비 노랑 바람개비 바람개비 든 손, 앞으로 쭉 뻗고 운동장을 달렸네 동네 골목을 달렸네 배경은 아무래도 좋았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바람개비 파르르르, 파르르르, 잘도 돌았지 야무진 바람개비 내 심장 벅찬 바람으로 파들거리고 웃음이 절로 터졌지! (설치미술 : 김언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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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봄이 씌다시(詩)/황인숙 2014. 7. 25. 11:28
노랑꽃들과 분홍꽃들과 갈색 덤불 위에 너의 연록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화롭고 우아한 여린 초록이 내 눈에 씌였다. 보도 블록에도 버스표 판매소에도 마주오는 사람의 얼굴에도 지나가는 버스에도 건너편 유리벽에도 허공에도 하늘에도 너의 그림자가 어룽댄다. 세상이 너의 어룽 너머로 보인다. 그리고 이 소리는 무엇일까? 이것은 소리일까? 이 기분 좋은, 조용히 부풀었다가 잦아들곤 하는 이것은 너의 호흡 햇빛 속에 여려졌다 짙어지는 녹색의 현들. 오늘 나는 온종일 상냥하다. 너의 그림자 속에서. 휘늘어진 너의 가지들은 햇빛 속에서 주의 깊고 온순하게 살랑거린다. 내 마음은 그 살랑거림 속에서 살랑거린다. 너의 이파리들 속에 얼굴을 파묻고 오래도록 너를 껴안고 싶다. 너의 여림과 고즈넉함이 나의 몸에 배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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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숨쉬는 명함들시(詩)/황인숙 2014. 7. 25. 11:16
약수터 가는 길의 서늘하고 침침한 나무 그늘 납작하고 딱딱한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그는 명함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빠닥빠닥 부스럭부스럭 배고픈 다람쥐처럼 평생 좋은 일은 자그마한 것이나 드물게 보았을 그보다 좀더 큰 나쁜 일들을 드문드문 보았을 안경을 치켜올리며 그는 그 흰 빠닥종이를 뒤적거린다 나이는 예순에서 예순다섯 사이 차림새는 그럭저럭 말끔하다 그는 명함 속으로 빨려들어가 있다 무엇을 찾는 걸까? 사랑이나 감사, 쓸모의 징조를? 그는 수줍어 보이고 영악해 보이고 고적해 보인다 숨쉬는 명함들 그의 평생이 담긴 명함들 어떤 명함은 기억에 없다 그 자신의 삶의 어느 부분처럼 그는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쓱 문지르고 천천히, 꼼꼼히 명함을 들여다본다 숲을 울리는 꿩 울음소리도 한참을 지켜보는 내 시선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