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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숨쉬는 명함들시(詩)/황인숙 2014. 7. 25. 11:16
약수터 가는 길의
서늘하고 침침한 나무 그늘
납작하고 딱딱한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그는 명함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빠닥빠닥 부스럭부스럭
배고픈 다람쥐처럼
평생 좋은 일은 자그마한 것이나 드물게 보았을
그보다 좀더 큰 나쁜 일들을 드문드문 보았을
안경을 치켜올리며
그는 그 흰 빠닥종이를 뒤적거린다
나이는 예순에서 예순다섯 사이
차림새는 그럭저럭 말끔하다
그는 명함 속으로 빨려들어가 있다
무엇을 찾는 걸까?
사랑이나 감사, 쓸모의 징조를?
그는 수줍어 보이고 영악해 보이고 고적해 보인다
숨쉬는 명함들
그의 평생이 담긴 명함들
어떤 명함은 기억에 없다
그 자신의 삶의 어느 부분처럼
그는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쓱 문지르고
천천히, 꼼꼼히
명함을 들여다본다
숲을 울리는 꿩 울음소리도
한참을 지켜보는 내 시선도
명함들 속에 빠진 그를
낚아채지 못한다.(그림 : 최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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