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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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라 - 둥근 반지 속으로시(詩)/이사라 2019. 10. 11. 09:09
봄볕이 내려앉는 창가에서 이렇게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인 듯 한 사람인 듯 눈동자 속에 둥근 집 한 채 짓고 눈빛 속에 눈물 속에 눈뜬 꿈 둥글게 두고 싶다 둥근 세상과 한 몸으로 철철이 물들어 눈 밖에 나는 일 없으면 좋겠다 딱딱한 것 깨고 나와 알고도 모르는 척 다시 세상 살면서 온 마음이 온 마음에게 부딪쳐도 즐겁게 쓸리는 여는 봄날같이 가지 끝의 연륜이 가벼울수록 팔랑팔랑 안타까운 봄날같이 사랑했던 사람들 다시 파릇한 봉분에서 피어오르는 봄날같이 이렇게 둥근 눈으로 마주 보며 말 못하고 피 마르는 고통도 오래될수록 씨눈 된다는 말, 이젠 믿는다 사랑은 말없이 둥글다며 누구나 말없이 단풍 들고 낙엽 지고 누구나 말없이 봄볕 들고 새순 돋는다는 말, 정말 믿는다 둥글게 세상 담은 반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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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라 - 밥의 힘시(詩)/이사라 2019. 10. 11. 09:02
가을이 가고 겨울 오는 길이 서늘합니다 며칠 동안 그 길에서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한 마음과 한 마음 사이를 무사히 지나기가 어렵다고 몸에게 말해주는 신(神) 하나가 그렇게 서늘한 기운으로 지나갑니다 신열로 오르내리는 세상이 어쩌면 몸속에 남은 마지막 힘인 듯 제게 느껴집니다 계속 그 길 따라 걸어가면 집들이 서릿발 꼿꼿한 창문을 달고 겨울은 그렇게 얼어가겠지만 창문 너머 저기 저 부엌의 밥솥 안에서는 둥근 맨얼굴들이 송글송글 땀을 흘리고 있을 테지요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한고비 넘긴 몸이 밥솥 안의 끈기처럼 밥의 힘을 믿는 사람과 함께 더 둥글게 또 한세상을 지나갈 것입니다 (그림 : 이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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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라 - 이런 기억도 사랑이라네시(詩)/이사라 2019. 10. 11. 08:59
다시 봄날이 지나고 흰 눈도 녹고 풀이 나무가 되기도 했던 기적 같은 시간들도 떠나가고 그럴 즈음이었다네 담장을 쓰다듬는 햇살 속 소곤거리며 기어오르는 넝쿨손을 기억하며 낡은 집은 더 낡아갔다네 나의 벽이 드러나는 집 한 채 오똑 벗은 시간의 몸을 나는 모르는 체했다네 벽이 흐물흐물해질 무렵 떠나가는 시간들이 드리우는 음영이 긴 철골 기둥 하나가 슬그머니 나의 허리께를 뚫고 들어와 빈 몸에 내벽 세우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심 딴청부렸다네 돌아올 시간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시 봄날이 회생하고 또다시 흰 눈이 쌓이고 내벽과 나의 벽이 사랑을 나누어 가진 것을 기억할 수 있다네 그가 나를 밀어내기 전까지 나의 몸이 거울 밖으로 쏟아져 한 줌 파편들이 될 때까지 함께한 날들이 사랑이었다고 기억할 수 있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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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라 - 옛 공터시(詩)/이사라 2019. 10. 11. 08:41
마음 쓸리며 다치며 어리석게 살다보면 등뒤로 돌아서서 오던 길 다시 가고 싶다 멀리서 끌어당기는 첫 눈길 따라가서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옛 공터에 몸 뒹굴고 싶다 뒷길은 기억의 끔에서 기다려준다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그렇게 웃어준다 그러면 어느 역이건 내려서 중앙시장의 중앙을 지나 어느 골목이어도 좋을 골목길로 접어든다 지친 눈 안으로 스르르 공터가 들어오고 마음에 새긴 사방치기 금이 거기서 아직 희미하게 내 몸안에 금을 긋는다 동쪽으로 가면 동쪽의 공터 서쪽으로 가면 서쪽의 공터 그동안 채워진 것은 햇살에 변색되어버린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시간의 몸뚱이 되돌아올 발끝에서 발길에 채이기를 기다려 그동안 길게 누워 있던 낡은 명패 같은 마음 부드러운 그 빈터에 아무 말없이 나는 또하나 공터를 심는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