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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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라 - 옛사진첩시(詩)/이사라 2018. 9. 7. 23:47
그때는 몰랐어도 뒤늦게 알게 되는 순간의 세계가 있지 옛 사진첩을 꺼내보는 갈피에서 툭 떨어지는 어느 여름날 유행하던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정면을 향해 웃고 있는 그녀 그때는 그녀만 보였는데 지금 보니 클로즈업 된 상반신의 그녀 뒤로 원근법적으로 자그맣게 사람이 지나가네 그녀의 배경이 된 모르는 그 사람 그러나 보폭만은 성큼 큰 그 사람 그는 그의 앞만 보고 가네 그녀의 정면과는 또다른 그의 정면을 응시하는 걸 이제야 나는 보네 그때 그녀는 그를 모르고 지금도 그녀는 그를 알 도리가 없지만 우연히 그가 그때 거기를 지나갔듯 우연히 그녀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왜 이제야 다시 생각하는 것일까 옛 사진첩 갈피마다 피어나는 회상의 존재론 엷은 구름 같은 옛 사진첩 다시금 순간이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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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라 - 말단(末端)의 사랑시(詩)/이사라 2018. 9. 7. 23:43
어느 강가든 숲이든 어느 가문이든 오래도록 살아온 뿌리 깊은 나무가 있어 겨울 겪고 초여름 거쳐서 여기까지 온 몸통 굵은 것들의 무게가 낳은 침묵이 있어 잎들이 무성할수록 더 침묵하면서 몇 개의 잎사귀를 지닌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지나온 것들을 품는다 가벼운 날들에게는 가볍게 어려운 날들에게는 어렵게 폭풍 치는 날 그렇게 큰 때를 만나면 크게 뭉쳐서 온 힘을 다해 둥치를 붙들고 바람이 그치면 그저 또 상관없는 사이처럼 각자 무심하게 매달려 있다 밑둥 튼실한 나무 가지의 말단에서 말단의 사랑이 마음놓고 하늘거린다 (그림 : 김성실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