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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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봄밭시(詩)/이은봉 2021. 3. 4. 16:48
월산리 부채밭에는 벌써 어린 새싹들, 뾰족뾰족 주둥이 내밀고 있다 새들도 날아와 지저귀고 있다 이 부채밭, 아주 오래된 곳이다 먼 옛날 백제 때부터 조상님들 대를 이어 일구어온 곳이다 올해도 농사를 지으려면 이곳 부채밭, 갈아엎어야 한다 트랙터가 있으면 좋겠다 쟁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때가 되면 삽과 호미로라도 여기 부채밭, 갈아엎어야 한다 그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농사는 아득한 삼한 때부터 해온 일, 이미 봄이 훌쩍 와 있으니 삽과 호미라도 들고 나서야 한다 월산리 부채밭, 갈아엎지 않고 어찌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줄 수 있으랴 겁내지 마라 누가 뭐래도 봄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계절!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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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따듯한 말시(詩)/이은봉 2020. 4. 5. 21:18
말에는 다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지 차가운 말에는 차가운 마음이 담겨 있고 따듯한 말에는 따듯한 마음이 담겨 있지 따듯한 말은 사전 속에 있지 않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나날의 삶 속에 있지 밥솥의 밥처럼 말도 서로 나눌 때 따듯해지지 따듯한 세상을 위해 따듯한 말 나누어야지 국솥의 국 나누듯 따듯한 말 나누어야지 따듯한 말은 배추 속처럼 뽀얗고 부드럽지 언제나 가슴 둥그렇게 부풀어 오르게 하지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말을 나누다 보면 무쇠 밥솥의 찰진 밥을 나눌 때처럼 세상 둥그렇고 찰지게 익어가지 주걱 위 밀가루 반죽 젓가락으로 뚝뚝 떼서 만든 구수한 수제비 같은 말 만들고 싶지 따듯한 말로 가득한 세상 만들고 싶지. (그림 : 이형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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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옛집시(詩)/이은봉 2019. 11. 14. 19:34
여우비 한줄금, 꼬리를 감춘 뒤였네 대문을 열자 잡풀 우거진 마당가 반쯤 들려 있는 돌쩌귀 은빛 거미줄에 싸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네 온통 물에 젖은 채 사랑채 토광 속에는 묵은 살림들 건넌방 툇마루 위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오랜 세월들 놋주발이며 양재기며 종이 그릇 따위 눅눅히 몸을 비틀며 누워 있었네 이끼 낀 뒤꼍 장독대 위, 깨진 항아리 속에는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져 잔뜩 찡그린 채 뭉개져 있거늘 무엇 향해 안부를 물을 것인가 들큼하게 메주가 익던 끝방 나지막한 시렁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네 우물가에는 두충나무 잎사귀들 이제는 아무도 약으로 쓰는 사람이 없어 퀴퀴한 냄새를 끌어안은 채 뭉텅뭉텅, 떨어져 썩고 있었네 텅 빈 외양간의 누렁이 따위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네 사람의 훈기가 있어야 탱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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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구름이었으면시(詩)/이은봉 2019. 11. 14. 19:30
구름이었으면 좋겠네 쓰고 싶은 모자를 쓰고 입고 싶은 바지를 입고 바람 불면 휙 떠났다가 바람 불면 휙 돌아오는 으음, 구름이었으면 좋겠네 털 많은 산양이 되었다가 깃 붉은 수탉도 되고 촐랑촐랑 토끼가 되었다가 꿀꿀꿀꿀 돼지도 되고 구름이었으면 좋겠네 마음 따라 버스도 되고 승용차도 되고 자전거도 되고 조랑말이 되면 어떤가 당나귀가 되면 어떤가 으음, 구름이었으면 좋겠네 바람 타고 고향에도 가고 고향에도 가 초록 들판 가득 채우며 비 되어 내리기도 하고 물 되어 흐르기도 하고. (그림 : 김윤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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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딱딱한 슬픔시(詩)/이은봉 2019. 11. 14. 19:26
슬픔을 만져 본 적 있니? 너도 네 손으로 직접 만져 봐 가슴 깊은 곳에서 네 뜨거운 슬픔을 꺼내 손으로 주물럭거려 봐 물렁물렁하니? 딱딱하니? 오래 묵지 않은 슬픔은 아직 불에 구운 돌멩이처럼 뜨겁지 뜨거우면서도 딱딱하지 십 년이 넘고 이십 년이 넘어야 겨우 물렁물렁해지지 하지만 오래 묵을 틈이 없지 물렁물렁해질 틈이 없어! 해마다 새로운 슬픔이 덧씌워지니까 슬픔은 본래 액체가 아니라 고체잖아 가슴 깊은 곳에서 자꾸만 버걱거리고 있는 네 독한 슬픔을 꺼내 너도 네 손으로 직접 만져 봐 주물럭거려 봐 어떠니? 딱딱하니? 견고하니? 보석처럼 반짝반짝하잖니? 이슬방울처럼 맑게 빛나잖아! (그림 : 원서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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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 파문시(詩)/이은봉 2019. 8. 17. 10:59
애초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했다 돌에 맞은 호수는 이내 파문을 일으켰다 애써 마음 가다듬고 있는 호수를 향해 ... 돌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파문은 둥근 물결도 품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파도도 품고 있었다 파도는 세상을 떠도는 한 자루 칼! 칼을 품고 있는 파문이 문제였다 칼은 어떤 것이든 찌르기 마련! 아무데서나 상처를 만들기 일쑤였다 매번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한바탕 곪아 터지고 나서야 겨우 아물었다 누군들 아프지 않으랴 누군들 반란을 꿈꾸고 싶으랴 공들여 마음 가라앉히고 있는 호수를 향해 돌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애초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했다 돌을 맞고 어찌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랴. (그림 : 공성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