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태수
-
이태수 - 자작나무 꿈길시(詩)/이태수 2023. 6. 29. 07:01
눈이 내리다 말다 하는 겨울 한낮 느리게 걷는 자작나무 숲길은 꿈길이다 이 나무들은 흰 살결을 드러내기보다 온몸으로 은빛 꿈을 내비치는 것 같다 그 사이로 걸어가다 보면 나도 몰래 그 꿈 언저리를 맴돈다 간간이 내리는 눈송이는 그 은빛 꿈에 같은 꿈을 포개는 걸까 오래전 톨스토이 영지에서 바라보던 그 자작나무들도 하늘로 팔을 뻗으면서 예까지 온 건지 보이다 말다 한다 자작나무 사잇길을 걷다가 보면 내 꿈도 검은 살결에 반쯤은 흰 빛깔을 내비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한결같이 하늘을 우러르는 자작나무의 온몸으로 꾸는 꿈같이 온몸으로 은빛 꿈을 꾸고 싶어진다 겨울 한낮 느리게 걷는 자작나무 숲길은 그런 꿈을 꾸게 부추기기도 한다 (그림 : 안소영 작가)
-
이태수 - 차의 속도를 붙이다가시(詩)/이태수 2022. 4. 20. 19:23
차의 속도를 붙이다가 문득 기계는 무섭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고장이 나지 않는 한 기계는 정직하기 때문에. 정직한 건 무섭다는 생각을 굴리면서 차의 속도를 줄이다가 정직하지 않은 것은 더욱 무섭다는 생각과 마주친다. 날이 갈수록 이지러지면서도 이즈음은 결벽증이 농도를 더하고 있음을, 이 세상이 점점 더 뒤틀리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급커브를 꺾는다. 차는 정직하게 급커브를 돈다. 세상에는 뒷문도 있고, 사람들이 이따금 안개 너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도 정직한 건 무섭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정직하지 않은 것은 더욱 무섭다는 생각을 떨굴 수가 없다. 차의 속도가 붙는 동안 고장이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갈 곳이 없으면서도 달리고 또 달리면서 나는 그 아슬아슬하고 풀리지 않는 거짓말 사이에 말뚝을 박는..
-
이태수 - 가을 달밤시(詩)/이태수 2021. 10. 23. 14:21
깊어가는 가을밤, 환한 달빛 아래 샐비어들이 시들고 마른 풀들이 눕는다 하루치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다 말고 오래된 회화나무 등걸에 우두커니 등을 기대어 선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뿌리로 힘주는 나무들을 자꾸만 흔들어댄다 달빛을 그러안는 듯, 가지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단풍나무 붉은 잎들 무슨 풀벌레들인지, 서늘한 바람 소리와 달빛의 각단에 울음소리를 끼얹고, 쟁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얼씬대지 않는다 달빛 속의 집들도 불을 다 꺼버렸다 (그림 : 장용길 화백)
-
이태수 - 망아지의 풋풋한 아침이 되고 싶다시(詩)/이태수 2020. 12. 5. 13:21
망아지를 키우고 싶다. 내 가슴에 으으으 입술 깨무는 이 목마름을 위하여, 날이면 날마다 가위눌리는 가난한 꿈을 위하여, 뛰어가고 싶다. 때로는 물거품처럼 부서지더라도 식어가는 가슴에 하나, 불을 달고 오랜 망설임도 주저앉아 기다리던 기다림도 박차버리고, 이마를 부딪고 싶다. 휘어지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맹렬하게 하지만 싸늘하게 눈 부릅뜨고 화살 되어 꽂히고 싶다. 어딘가 가 닿아 뜨겁게 불붙고 싶다. 지친 밤에는 하늘의 별들 하나씩 불러 모으고, 가혹한 꿈 돋우어내며 새우잠 속의 뒤척임, 이 아픔도 새벽하늘에 내어다 걸고 어둠 가르며 번뜩이는 칼날이 되고 싶다. 별빛이 되고 싶다. 아아, 망아지가 되고 싶다. 울타리 뛰어 넘어 혹은 불처럼 거침없이 치닫는 야생의 고삐 풀린 망아지, 망아지의 풋풋한 아침이..
-
이태수 - 불빛과 그림자시(詩)/이태수 2020. 12. 2. 12:05
해 질 무렵에 다시 불을 댕긴다 어둠살이 밀려오고, 가슴에는 불꽃이 조그맣게 타오른다 닿을 듯 말듯 닿지 않는 길 저편의 가고 싶은 곳은 여전히 목마르게 할 뿐 창가에 앉으면 그저 되돌아온 느낌이다 헛돌다 온 것도 같다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굴러 올려 봐도 다시 미끄러져 내리던 길 위의 발자국들이 죄다 이지러진 채 내 옆에 따라와 웅크리며 앉는다 유리창 너머 켜진 수은등이 채도를 높이는 동안, 아닐세라 일렁이며 다가서는 나무 그림자 해가 지면 짙어지는 어둠과 불빛 등지고 서는 그림자들 그렇겠지, 그림자는 그림자끼리 어둠은 어둠끼리 가깝게 마련이겠지 가슴에 가물거리는 불빛이 거느린 그림자들이 어두운 창밖으로 서두르며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그림 : 이갑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