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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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 봄비 소리시(詩)/이태수 2019. 3. 19. 21:13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비가 내리며 창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봅니다 손이 흠뻑 젖도록 빗물은 손바닥을 두드립니다 빗소리 따라 더디지 않은 걸음으로 봄이 젖은 얼굴을 들며 오고 있는가 봅니다 뜰에 세워 둔 자동차 지붕 위에 빗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습니다 차츰 속도를 내며 뛰어내리는 빗줄기가 자동차 지붕을 두드려 대는 소리입니다 빗소리는 비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비를 받아들이는 것들이 빚는 소리들입니다 바깥으로 나가 봄을 재촉하는 비를 한껏 받아들이며 빗소리를 내고 싶어집니다 간밤 꿈속에서 본 형형색색의 봄꽃들이 일렬종대로 눈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뜰에서는 모든 것들이 비를 받아들이며 제각각 새 아침의 봄비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림 : 안창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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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 수평선시(詩)/이태수 2019. 1. 10. 00:20
해변의 외딴집 낯선 창가에 앉아 먼 수평선을 바라본다 하늘과 바다가 올라가고 내려오려 하지만, 서로 끌어당기고 끌어들이려 하지만, 팽팽한 경계, 그 사이로 작은 어선 몇 척이 떠간다 바다와 하늘은 끝내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한다 끌어당겨지지도 끌어들여지지도 않는다 해가 서녘에 기울 때까지 수평선 멀리 괭이갈매기들을 따라나서는 마음에 날개를 달아보려 할 따름이다 해변의 낯선 외딴집 창가에 앉아 올라가려는 마음과 내려오려는 마음을 끌어당기고 끌어들이려할 뿐, 하늘과 바다 사이에 보일 듯 잘 안 보이던 내 마음의 수평선도 차츰 뚜렷해진다 그 수평선을 홀로 들여다봐야만 한다 (그림 : 이임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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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 눈은 내려서시(詩)/이태수 2019. 1. 10. 00:00
눈은 내려서 우리 집 낮은 처마 밑에 붐비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저녁 불빛, 서성이며 목말라하는 나의 어깨 위에도 몰려오고, 앓아누운 어린 것 이마를 짚고 있는 내 손을 더욱 더욱 시리게 하고, 눈은 내리고 내려서 이 저녁, 허우적이는 내 마음 빈 가장귀와 간밤 꿈에서 만난 빛 사이를 이어주고, 덮어주고, 눈은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려서 지워지는 것들, 천천히 살아나게 하고, 살아나는 모든 것들을 지우고 지우며 아득하게 서성이는 밤을 안겨다 주고. (그림 : 김종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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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 고엽(枯葉)시(詩)/이태수 2019. 1. 9. 23:37
또 한 잎 낙엽, 그 붉은 잎을 가슴에 묻는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피치카토로 ‘고엽’의 마지막 소절에 낙엽 소리를 몇 점 끼얹는다 너는 어디쯤 가고 있는지,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너와 나 사이의 서늘한 바람 소리, 네 뒷모습이 이다지도 아프다 붉게 타오르는 서녘 노을 내 곁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잰걸음으로 가 버리고 홍단풍나무 밑 벤치에 홀로 남는다 발치에 떨어진 낙엽 몇 잎이 나를 올려다본다 고엽(枯葉) : 조셉 코스마가 작곡하고 이브 몽땅이 불렀던 샹송 (이태수 시인)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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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 어떤 평행선시(詩)/이태수 2018. 12. 28. 21:39
담장 아래 연초록 풀잎들이 돋아난다 저버리지 않은 언약처럼, 못 견디도록 사무치는 그리움 같이, 북풍한설 다 밀어내고 햇살을 끌어당긴다 지난 겨우내 참아온 말, 너를 좋아한다는 그 말, 안으로 굳게 빗장 지른 채 무덤까지 가져가야할 것 같은 그 말 한마디, 남몰래 햇살에 꺼내보다 깊이 끌어안는다 세월은 덧없이 흐르는 물, 영영 되돌릴 수 없는 화살 같지만 봄은 또 발자국소리도 없이 먼 길 돌아서 오고, 꽃들은 다투어 피었다 이내 지고 말겠지 이름도 알 수 없는 작은 새들이 담장 옆 빈 나뭇가지애 앉아 밝게 지저귄다 나무들도 제자리에서 힘껏 달리고 있는 중일까 내 마음 알 리 없는 너는 저만큼 가지만, 그래도 이 평행선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아무도 몰래 쟁이고 또 쟁여온 말,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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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 적막, 또는 늦가을 저녁시(詩)/이태수 2018. 10. 13. 09:54
서녘이 붉게 설레다 가라앉는다. 땅거미 짙어지는 산 발치, 잎새 떨구는 나뭇가지 사이로 둥그렇게 달이 떠오른다. 작은 별들은 이마 조아리며 하늘 자락 여기저기 모여 앉는다. 동네 조무래기들처럼 눈빛이 푸른 별들, 내 마음 자락에도 푸르게 돋아난다. 적막이 감싸안은 늦가을 숲은 그 품속으로 낮고 깊게 잦아든다. 둥근 달도, 푸른 별들도 고요하고 쓸쓸한 그 품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서늘한 바람에 옷자락 날리며 나도 따라들어간다. 새 한 마리가 문득 한 나뭇가지에서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 앉는다. 적막의 가장자리가 잠시 흔들린다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산 발치의 나무들과 하늘의 달과 별들, 새의 날개짓과 바람소리도, 나도, 적막 속에 낮게 낮게 엎드린다. 하늘은 그 윗가장자리. 어두운 땅과 그 위의 모든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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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 월광곡 (月光曲)시(詩)/이태수 2018. 7. 10. 13:05
제 발치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벽오동나무, 커다란 잎사귀에 노 저어 내리는 달빛 오래 기다린 그 사람 올 것만 같아, 그 발소리 나직나직 다가서듯 들리는 것만 같아 하염없이 달빛 끌어당겨 그러안는다 잦아들듯 젖어 오는 풀벌레 소리, 서늘한 바람 소리 벽오동나무가 비단을 짠다 달빛과 풀벌레 소리로 비단을 짠다 밤 이슥토록 제 홀로 비단 자락 펼쳐 낸다 그 사람 끝내 안 돌아와도 먼 데로 영영 떠나 버렸을지라도 그리운 마음, 달빛, 풀벌레 소리 엮어 짠다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벽오동 잎사귀에 내린 달빛 촘촘한 비단 한 필, 그 사람 더듬어 펼쳐 올린다 (그림 : 조선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