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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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 베낀시(詩)/허수경 2018. 10. 25. 11:40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 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 영원한 이별을 베꼈고 오늘 아침 국 속에서 붉은 혁명의 역사는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뜬 고요를 베낀 밤하늘 밤하늘을 베낀 박쥐는 가을의 잠에 들어와 꿈을 베꼈고 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 그 안에 서서 너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구인가 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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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 수박시(詩)/허수경 2018. 10. 20. 11:55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 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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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 네 잠의 눈썹시(詩)/허수경 2018. 9. 5. 00:16
네 얼굴 아릿하네, 미안하다 ) --> 네 얼굴의 눈썹은 밀물과 썰물의 무늬, 하릴없이 달은 몸자국을 안았구나 달눈썹에 얽힌 거미는 어스름한 잎맥을 그냥, 세월이라고 했다 ) --> 어설픈 여인아 얼마나 오랫동안 이 달, 이 어린 비, 이 어린 밤동안 어제의 흉터 같은 당신은 이불을 폈는지 ) --> 어미별의 손은 너를 배웅했다 그 저녁, 울던 태양은 깊었네 ) --> 그 마음에 맺힌 한 모금 속 한 사람의 꽃흉터에 비추어진 편지는 오래된 잠의 눈썹 ) --> 시작 없어 끝 없던 다정한 사람아 네가 나에게는 울 일이었나 나는 물었다 아니, 라고 그대 눈썹은 떨렸다 ) --> 네 눈썹의 사람아, 어릿하네, 미안하다 (그림 : 류영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