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수경
-
허수경 - 공항에서시(詩)/허수경 2018. 6. 30. 10:06
기다림만이 내 영혼의 물속을 헤적이는 날 당신이 언젠가 들렀을 것만 같은 공항으로 간다 기차나 배를 타고 오기에도 버스는 더더욱 안 될 어스름한 저편에 서서 기다린다 당신이 오는 발자욱마다 손가락이 돋아나 지그시 누리는 자리마다 멍이 든다 밤 11시 24분 비행기가 도착하고 새벽 02시 55분 비행기가 떠날 때 전광판에는 도착하는 비행기와 떠나는 비행기가 검은 눈빛처럼 반짝인다 모든 길은 거짓이고 또한 그림자 같아서 백 년을 살아도 낯설 고향의 새벽 공항에 앉아 아주 조금 술을 마신다 당신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목소리도 마치 전생의 무늬 같다 취기만이 당신인 것처럼 곁에 앉았는데 많이 잘해주지 못해서 마음은 비었고 많이 안아주지 못해서 손도 비었다 꼭 내가 당신을 배반한 것같다 우리 모두 다만 기어이 ..
-
허수경 - 목련시(詩)/허수경 2017. 4. 9. 14:57
뭐 해요? 없는 걸 보고 있어요 그럼 눈이 많이 시리겠어요 예,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 없는 세계는 없고 그 뒤안에는 나비들이 장만한 한 보따리 날개의 안개만 남았네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길도 나비 날개의 안개 속으로 그 보따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한데 낮달의 말은 마음에 걸려 있어요 흰 손 위로 고여든 분홍의 고요 같아요 하냥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예, 하지만 아직 본 적 없는 눈동자 같아서 이 절정의 오후는 떨리면서 칼이 되어가네요 뭐 해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목련, 가네요 (그림 : 곽나원 화백)
-
허수경 - 이 가을의 무늬시(詩)/허수경 2016. 10. 26. 09:38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
-
허수경 - 울고 있는 가수시(詩)/허수경 2016. 5. 28. 23:01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사랑아, 가끔 날 위해 울 수 있었나 그러나 울 수 있었던 날들의 따뜻함 나도 한때 하릴없이 죽지는 않겠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돌담에 기대 햇살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네 맹세는 따뜻함 처럼 우리를 배반 했으나 우는 철새의 애처러움 우우 애처러움을 타는 마음들 우우 마음들이 가여워라 마음을 빠져나온 마음이 마음에게로 가기 위해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 울 수 있음의 따뜻했음 사랑아, 너도 젖었니 감추어 두었던 단 하나, 그리움의 입구도 젖었니 잃어버린 사랑 조차 나를 떠난다 무정하니 세월아, 저 사랑의 찬가 (그림 : 조석주 화백)
-
허수경 - 진주 아리랑시(詩)/허수경 2016. 5. 28. 22:54
오고 있네 오고 있네 불씨 빼앗긴 마음에도 그리븐 청청한 눈물 대가야적 말발굽 소리로 오고 있네 인두질로 꼭꼭 다진 금관가야 깨어진 흙그릇에 사금지는 달빛으로 오고 있네 고령가야 벗은 산맥마다 본가야 소가야적 여울물 젖살로 오고 있네 아리랑 참빛결대로 스리랑 옷고름 무너지는 기척 비때죽꽃 서리 내려 가야아낙 아라리요 남정 뼈끝에서 새살 돋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남정 비켜 찬 허리춤치 칼집에선 신라의 호적이 우는데 아낙 은장도는 떨려 떨려 우는데 아리랑 산고개마다 불씨 지키던 스리랑 숨살로 뻗어오던 바람이 못 살아 못 살아 타령으로 젖다가 남정 윗저고리 땀내 그리븐 불씨로 포개져서 빛나네 어쩔거나 가야아낙 인두 끝으로 꼭 꼭 눌러 삭히는 옛사랑 아리랑은 어쩔거나 어쩔거나 사람이여 (그림 : 조규석 화백)
-
허수경 -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시(詩)/허수경 2015. 10. 16. 00:07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절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인왕제색(仁王濟色)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그림 : 이시원 화백)
-
허수경 - 그래, 그래, 그 잎시(詩)/허수경 2015. 8. 21. 21:11
그 잎 여릴 적, 우리 만나 잎 따서 삶아 밥해주던 할머니집에 앉아 여린 잎에 하얀 밥 싸 먹으며 벙그러 지는 입술 오무리며 깔깔거리다가 어머 어머 할머니 설거지 많겠네, 어쩌나, 그때 그 잎 여려 할머니의 아 가 같은 손힘으로도 뚝 뚝 꺾이는 것을, 그 잎 커다랗게 자라 그늘 만들고 그늘 아래 비 그 으며 수박 오이가 익는 것 들을 때까지 기다리자, 하며 할머니가 떠 오는 설거지물에 마치 오랜 시간 씻듯 양 은 밥주발 씻으며 할머니가 잎 옆에 달린 꽃 머리에 꽂 으며 벙그렇게 웃는 것 보며 그래, 그래 저 잎 더 무성 해져서 산 덮고 그 산, 잎그늘 아래 축축한 땅의 수줍은 곳 열어 버섯 돋아오르면 그때 또 할머니가 지어주는 버섯 밥 먹자, 좋겠네, 저 잎 여릴 때 만나 무성하게 산그늘 될 때가지 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