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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 공항에서시(詩)/허수경 2018. 6. 30. 10:06
기다림만이 내 영혼의 물속을 헤적이는 날
당신이 언젠가 들렀을 것만 같은 공항으로 간다
기차나 배를 타고 오기에도
버스는 더더욱 안 될 어스름한 저편에 서서
기다린다 당신이 오는 발자욱마다 손가락이 돋아나
지그시 누리는 자리마다 멍이 든다
밤 11시 24분 비행기가 도착하고
새벽 02시 55분 비행기가 떠날 때
전광판에는 도착하는 비행기와 떠나는 비행기가
검은 눈빛처럼 반짝인다
모든 길은 거짓이고 또한 그림자 같아서
백 년을 살아도 낯설 고향의 새벽 공항에 앉아
아주 조금 술을 마신다
당신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목소리도 마치 전생의 무늬 같다
취기만이 당신인 것처럼 곁에 앉았는데
많이 잘해주지 못해서 마음은 비었고
많이 안아주지 못해서 손도 비었다
꼭 내가 당신을 배반한 것같다
우리 모두 다만 기어이 가야 할 곳으로 떠난다
산으로 바다로 항구의 젖은 가슴에게로
그래서 이 지구에는 기다림에 살이 아픈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고
마을에는 연인을 지켜주는 방도 있다
그래서 나무들은 조금씩 키가 자라고
잎들은 조금씩 빛을 해에게 내준다
어제는 당신이 나를 더 기다렸고
오늘은 내가 당신을 더 기다린다
그것만이 농담이 아닌 이국의 공항에서
상냥한 벗인 취기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당신을 기다리면서 물들면서
나는 이 세상 속, 어떤 예쁜 사람이 되어
사라져간다
(그림 : 신흥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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